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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큰엄마 Sep 18. 2020

친정아버지와 사과



“할아버지! 예지 왔어요!”
아침부터 서둘러 건너왔지만 늦었나 봅니다. 적막이 흐르는 집 안마당을 숨바꼭질하듯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며 동동거리는 딸아이의 뒷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집니다.
“할아버지 과수원에 벌써 가셨나 보다. 우리도 출동!”
작년 추석은 다른 해에 비해 빠른 편이라 사과수확을 앞당겨하게 되었습니다. 통화 중 흘려 말씀하셨던 작업 날짜를 단단히 기억해 두었다가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왔지만 벌써 새벽같이 일을 시작하신 모양입니다.
 


“예지가 할아버지 일 도와주러 왔어? 허허.”
역시나 예상이 맞았습니다. 깊게 파인 목주름 사이로 땀이 고인걸 보니 한참 전에 오셨나 봅니다. 오는 길에 사 온 비타민 음료수와 빵, 과자 등을 내놓았습니다. 과수원 바닥에 낙과 중 한 녀석을 주어서 깎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과자 한 봉지를 뚝딱 해치운 딸아이를 보면서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와! 올해도 사과에 꿀이 가득 찼네요.”
“그러냐? 지난해보다 까치도 덜 먹었다.”
말수가 적으신 아버지의 얼굴에서 흡족한 표정을 단번에 알아차린 나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딸아이도 제 몫을 한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무 아래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과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과수원은 300평 남짓한 작은 밭입니다. 사과가 유명한 예산지역에서는 몇 트럭째 내다 파는 대형 과수원에 비해서는 택도 없이 작은 규모입니다.
추석 대목이라 공판장에는 인근 지역서 재배된 사과를 비롯한 수많은 과일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늘 예상했듯 가격은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딸처럼 귀한 결실이지만 정작 만족스럽지 못한 가격에 팔아야 하는 게 매년 수확시기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버지는 손녀딸 앞에서 낮은 자세로 앉아 눈을 맞추십니다.
“오늘 할아버지 돈 벌었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짜장면!”
그렇게 딸아이는 할아버지와 윙크를 주고받으며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남은 사과는 인터넷에 농산물 직거래 시장이 있는데 거기에 한번 올려볼까 봐요.”
“그런 것도 있냐?”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짓고 능금 공판장에 파실 줄만 알았지 직거래나 다른 판로로 영업도 팔아본 적도 없으셨던 터라 생소해하셨습니다.
“제가 올려볼게요. 사과 사진이랑 생산자 이름, 가격 등 정보를 적고, 연락처는 제 것을 올릴 테니 나중에 전화만 잘 받으시면 돼요.”
 


그렇게 해서 농산물 직거래 사이트에 사과 판매글을 올렸고 한 사흘이 지났을 때쯤 구입문의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나 하고 작은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한 박스 두 박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정말이지 이렇게 팔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계좌에 입금된 걸 확인하고 추석 연휴에 맞추어서 일괄 배송한다는 멘트를 써놓았습니다. 공판장에서 주는 가격보다는 직접 포장해서 소비자에게 파는 것이 더 큰 이득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따놓은 사과들을 일괄 포장을 하고 그동안 주문받은 고객 리스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택배 송장을 붙인 게 총 30박스였습니다.
대량으로 유통하는 대형 과수원들에게는 턱없이 작은 숫자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300박스 아니 3억 개의 박스보다 더 빛나는 보물상자였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일괄 택배를 보내고 며칠이 지난 아침부터 요란한 진동 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심각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목이 잠겨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용은 사과가 모두 멍들어서 왔다는 겁니다. 사진을 보내주겠다면서 추석 차례용으로 산 건데 어떻게 할 거냐고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져 왔습니다.
사진을 열어보니 포장할 당시만 해도 분명 보석같이 반짝반짝 빛나던 사과들의 표면이 동전 모양의 검은색 멍자국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또 다른 이곳저곳에서도 전화와 메시지가 빚발치듯 왔습니다. 그것들 또한 같은 내용 비슷한 사진들 이었습니다.
놀란 마음에 친정아버지께 급하게 전화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끊었습니다. 순간 이 사실을 알리면 얼마나 놀라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여며왔습니다. 깊은 숨을 한번 내쉬고 일단 마음부터 다 잡았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여기저기 알아보았습니다. 원인은 박스 내부에 충격방지용 그물망을 일일이 하나씩 씌운 다음 그 위에 스티로폼으로 덮는 이중 포장을 했어야 했는데 처음 하는 택배 포장에 그런 사실을 알리 만무한 우리는 세심한 것까지 챙기지를 못한 것이 이런 대형 참사를 불러왔습니다.
 


“큰일 났구나.”
칠십 한 평생 논, 밭을 일구며 예고 없는 재해들을 수도 없이 맞은 터라 마음엔 이미 단단한 굳은살이 자리 잡은 아버지라 믿었습니다. 걱정을 수시로 하는 딸에게‘괜찮다. 괜찮다.’ 말씀하시던 바위만큼 듬직한 분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정말로 큰일이 난 것 같았습니다. 괜히 평온하게 농사 잘 짓던 분을 휘둘러 놓은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연락 온 곳들 다시 포장해서 보내드리면 돼요.”
나는 아버지의 작은 손은 잡아드렸습니다. 까맣고 주름진 손이 살짝 떨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리 접어놓았던 사과상자가 있는 쪽을 골똘히 바라보셨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뭔가를 생각하시다가 무거운 입을 떼셨습니다.
“나는 말여. 저 상자 옆구리를 모면 기분이 참 좋아. 생산자 이름 쓰도록 저렇게 비어 있잖여. 물론 사 먹는 사람들이야 눈길 한번 안주 것지만 1년 내내 눈, 비 맞으며 농사짓고 가장 마지막으로 써넣는 것이 바로 저기에 내 이름 석자여.
학창 시절에 큰 도시로 유학 간 친구 놈들이야 번듯한 직장에 지이름 파져 있는 명함을 양복 속주머니서 자랑스럽게 꺼내 뿌리고 다녔지. 하지만 난 뭐....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들이며 산이며 돌아다니며 남의 집 농사일 도와주고 일당 받는 게 전부였어. 그런 머슴 같은 놈한테 이름 석자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겠냐. 그래도 그냥저냥 햇빛 찌면 땡볕에서 땀 흘리고 바람 불면 구부정하게 바람맞으며 그렇게 일하며 학교 다니며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어. 그때도 일하느라 식도 못 가고 한참 후에 딸랑 졸업장만 친구 놈이 전해주는디 거기 적혀있는 내 이름 석자가 나는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 맨날 이리저리 소처럼 일만 하고 다녔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답게 자랑스럽게 느껴진거여. 그 후로부터 다짐혔어. 내 이름 석자. 남부끄러운 짓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자고 말여.
저 사과 상자에 이름 한 줄은 내 졸업장에 적혀있는 그 이름 석자만큼이나 값진거여. 내 자부심이여. 자식 같은 사과들이 몽땅 저렇게 흠집이 생겼다니 속상하고 참담한 일이지만 그래도 뒷일은 내가 감당 혀야 지. 내가 저 상자에 적혀있는 생산자는 나이니께 말여.”
아버지의 목소리는 작았고 중간중간 더듬거리 시긴 했지만 분명한 결심히 묻어 있었습니다.
순간 자식으로서 무조건 힘이 되어드려야겠다 라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사과를 택배로 받은 고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여 상태를 살폈습니다. 따로 연락이 오지 않은 곳도 빠짐없이 전화를 해서 받은 사과의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연락이 닿지 않은 고객에게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 받으신 예산사과 생산자 박성서의 딸입니다.
받으신 사과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연락드립니다. 몇몇 분이 사과에 멍이 들어왔다는 말씀을 하시어 혹시 선생님께서도 이런 일이 있으신지 염려되어 연락드립니다. 만약 하자 있는 추석선물을 받으셨다면 마음의 불편함을 드린 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저희가 택배 포장 경험이 부족해 충격방지 내부망을 씌우는 것을 빠트렸습니다. 한 해 동안 농사지은 자식 같은 사과를 보내드리려 했던 아버지의 진심만은 깊이 헤아려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 문자에 회신을 주시거나 전화를 주시면 다시 온전한 상품으로 사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후에도 며칠 간은 연락이 계속 왔고 잘 메모해두었다가 다시 사과를 택배 포장해 주거나 환불을 해드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알람 소리에 무심코 메시지를 열어 본 나는 갑자기 굵은 눈물방울이 샘물처럼 올라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지 잘 보았습니다. 저희 집 사과도 몇 개 좀 깨져오긴 했는데 그리 큰일은 아닌 것 같네요. 저는 환불이나 재배 송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느껴지는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오랜만에 받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걸로 대신할게요.’
그 이후에도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무척 속상해하셨겠네요. 그 마음 따님이 위로 잘해주세요. 가족애가 훈훈하게 느껴집니다.’
‘사과가 맛이 좋네요. 교회분들이 구입하고 싶다고 하는데 5kg 박스로 20개 추가 주문할게요. 아참 이번엔 포장 제대로 해서 보내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클레임과 재발송에 내색은 안 했지만 저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희망의 불씨가 가슴에서 잔잔히 살아나는 것이 느꼈졌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진심이 통했구나.’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딸아이와 친정을 찾았습니다. 추가로 들어온 주문 때문에 일 손을 보태러 온 것입니다. 아버지 뒷모습을 보니 선별된 사과들을 상자에 아기 다루듯 정성스레 넣고 계셨습니다. 서둘러 목장갑을 끼고 아버지 뒤에 살며시 섰습니다.
“사실 저는요... 연락 온 곳만 처리해 주면 되지 일일이 전화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했어요. 그런데 하나하나 다시 포장해서 보내는데 희한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 자신이 떳떳해지더라고요. 물론 이번 실수에 우리 가족이 조금 비싼 수업료를 내긴 했지만요. 아버지 말씀 듣길 잘했어요.”
이미 내가 온 걸 아신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만치서 딸아이가 빠른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자랑스럽게 무언가를 내입니다.
“할아버지 이거 내가 썼다!”
그렇게 손등 위에 철썩 놓인 것은 택배사에서 미리 받아놓은 빈 택배 송장이었습니다. 종이 위쪽 보내는 사람 이름 공란에 딸아이가 삐뚤빼뚤 큼지막하게 써놓은 글자들이 보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사랑해’
유치원서 한참 배우는 한글이라 조금 서툴긴 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평소에도 하고 싶었던 마음속, 입 안에서만 빙글빙글 맴돌던 그 한마디를 결국 딸이 해주는구나.’
순간 핑 도는 눈물을 목장갑으로 서둘러 닦아 냈습니다. 아버지는 손에 들어고 있던 사과를 잠시 내려놓으시고 건네받은 종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리곤 싱글 생글 웃고 있는 손녀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함박웃음으로 눈을 맞추십니다.
“점심에 할아버지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짜장면!”
딸아이와 친정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에게 윙크를 건넵니다. 점심이 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러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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