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가는 친정 나들이입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자동차로 2시간 반 걸리는 친정집은 충청도의 어느 한적한 농촌마을입니다. 빽빽한 도심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보면 논이 대부분인 들판이 펼쳐집니다.
"엄마, 논이 나오는 거 보니까 외갓집에 점점 와가는 거지?"
10살 난 딸은 빙긋 웃으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창밖 풍경들을 눈에 담았습니다.
"그래. 얼마 안 남았네."
내비게이션 속 키로수가 줄어들 때마다 몸에 베인 긴장감도 함께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딸아이보다 더 어린 꼬맹이가 숨어 있다가 친정집 가는 길에 한껏 들떠 폴짝폴짝 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플라터나스 나무는 언제나 그렇듯 하늘하늘 손짓하며 그 품을 단숨에 내어줄 것 같았습니다.
자동차는 마당에 도착했고 짐을 내릴 때쯤 친정 부모님이 대문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딸은 아기처럼 쪼르르 하고 친정엄마 품에 안깁니다.
"연락도 않고 왔어?"
"항상 집에 계시잖아. 지금처럼."
"할머니 요양원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어?"
할머니는 2년 전부터 요양원에 계십니다. 고관절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하셨는데 수년간 집에서 모시다가 고모들과 주변의 권유로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요양원은 사전에 전화로 예약을 해야 했고 날짜에 맞추어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나 봅니다.
점심 끼니도 해결 않고 친정엄마의 팔팔 끓는 김치찌개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달려왔건만 허기진 배가 요통치고 있었습니다. 주춤하고 있을 때쯤 딸아이는 벌써 친정아빠 트럭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30분여를 달려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도착했습니다. 주변엔 지나가는 바람과 요양원 건물만이 덩그러니 있는 게 지금의 할머니의 모습 같아 마음이 무거워져 왔습니다.
올해 96세를 맞으시는 할머니는 남편과 30대 초반에 사별하셨고 평생 농사일로 살림과 자식 넷들을 키워내신 우직하고 강하신 분입니다. 감히 몇 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할머니의 인생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과 풍파가 있었을 겁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쓰고 해가 내리쬐이면 수건을 쓰고 그렇게 새털같이 수많은 날들을 자식 뒷바라지하며 살아오셨을 겁니다. 친정아빠는 그중 장남이었고 결혼을 한 후에도 할머니를 모시며 희로애락 함께 한 세월 속에 강산은 그 모습을 수십 번도 넘게 바꾸었습니다. 저 또한 태어나서 쭉 할머니와 같은 지붕 아래 살아온 터라 거의 부모님과 같은 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보입니다. 요양보호사 분과 함께 다가온 할머니의 모습은 몇 달 전 뵈었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이셨습니다. 투명한 유리로 가려져 있어 손도 얼굴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왔는지 주변을 찬찬이 둘러보는 동작조차도 어색하고 힘에 부치는 듯 보였습니다. 요양원 동행을 잠시 주춤했던 내가 철없이 느껴져 귓불이 따끔거렸습니다. 부모님은 그간 안부를 물으셨고 저 또한 마음만큼 무거워진 입을 땟습니다.
"할머니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사.. 탕..."
"사탕 드시고 싶어요? 사다 드릴까요?"
그러자 휠체어 뒤에 서있던 요양보호사분이 서둘러 말씀하십니다.
"안돼요. 어르신 목에 그냥 넘어가면 큰일 납니다."
힘겹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시던 할머니는 몸속 모든 에너지를 다 쓰기라도 한 듯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휠체어 속으로 더 깊숙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혹시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
그러나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주름에 뒤덮인 얼굴은 실망을 넘어 절망적인 표정이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 속에 송알송알 맺힌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사탕을 드시게 하면 할머니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땅이 꺼질 듯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 안으로 은은한 노을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문득 스쳐가듯 30년 전 들녘에 뿌려진 노을이 생각났습니다. 금방 추수가 끝난 논에서 남은 벼이삭과 빈 포대자루 한 짐을 짊어지고 걷고 있는 할머니와 초등학생이었던 내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둑길 위에서 옆이 허전해 잠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만치에 멈춰 선 할머니는 몸빼 바지 깊숙이에 손을 넣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탕 하나를 꺼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힘들었지? 고생혔어. 아끼지 말고 지금 입에 넣고 가."
작은 손에 들어온 사탕은 포장비닐과 알맹이가 한 몸처럼 달라붙어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주머니에 있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캐러멜처럼 끈적했습니다. 아끼지 말라던 할머니가 오히려 당신 품에 오래 두고 계셨나 봅니다. 결국 두 손으로는 뜯기 힘들어 이빨로 깨물며 빨며 힘들게 까먹었던 사탕은 새콤달콤한 청포도 맛이었습니다. 쪽쪽 소리를 내며 먹을 만큼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어릴 적 그때 생각 속에서 빠져나 올 때쯤 할머니가 그렇게 드시고 싶어 하는 사 탕 한 알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온 지금의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그렇게 추억 속 기억들을 더듬더듬 꺼내는 사이에 차는 친정집에 도착했고 며칠 묵을 생각으로 싼 짐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이거 왕할머니 드릴까?"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밉니다. 작은 손에 있던 건 막대사탕 있었습니다.
"이거 지난번에 친구가 준 건데 가방에 있었어. 막대사탕은 한 손으로 잡고 먹어야 하니까 꿀꺽 삼킬 수 없잖아."
딸아이의 말이 기발하고 기특해서 품에 쏙 넣어 안아주었습니다.
될지 안 될진 모르겠지만 그 막대사탕을 보니 왠지 모를 희망이 생겼고 한결 마음이 편해져 왔습니다.
"예지야. 왕할머니가 이걸 보시면 기뻐서 펄쩍펄쩍 뛰실지도 몰라!"
할머니의 그 작고 간절한 목소리가 어린 딸아이 마음에도 와닿았나 봅니다.
오늘은 요양원 면회시간이 모두 끝났고 내일이나 가능하다는 말에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녘 서슬 퍼런 어둠 속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왔습니다. 밖에선 무심한 바람소리만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고 무거운 침묵 속에 통화가 이어져 갔습니다.
잠시 후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십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할머니는 그렇게 요양원에서 잠자듯 조용히 영원히 잠드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식들의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추운 겨울 어느 날 새벽에 요양원 침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드시고 싶어 했던 사탕은 결국 드시지 못한 채 뭐가 그리 바쁘셨는지 이 세상을 영영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마련된 장례식장에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는 주변의 친지와 이웃분들이 많이 와주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딸아이는 바지 호주머니 깊이에서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꺼냅니다. 할머니께 드리지 못했던 그 사탕이었습니다. 그리곤 살금살금 깨금발로 차려진 상 앞에 다가가 국화꽃 옆에 슬그머니 사탕을 올려놓고 서둘러 제 옆에 찰싹 붙어앉습니다.
"엄마. 왕할머니가 저 사탕을 드셨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살아계셨을까"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해. 궁금하고 아쉽고 서운해서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
딸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며 그 작은 품에 나를 넣었습니다.
"하늘나라 어디선가에서 편안하게 계실 할머니!
증손녀가 건네준 사탕은 입 속에 빙글빙글 돌고 있나요?
제가 꼬맹이 시절 먹었던 할머니가 주신 사탕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황홀한 맛이었어요. 저는 그 사탕을 평생 마음속에 품고 다닐 거예요. 그러다 행여나 인생살이 힘든 일이 닦치면 가던 걸음 멈추고 달달한 맛을 느끼게 해 주었던 사탕처럼 나를 응원해주는 내편이 있다는 걸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