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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키는 이유

소재 : 약속

by 벨라

열세 살, 세상의 무게를 알 리 없던 그때,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맹세했다.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해야만 비소로 진정한 단짝이 된다고 믿었다.

“나 생리해. 5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 했어.”

자랑스러운 듯 들뜬 내 고백에, 아름이의 커다랗고 맑은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진짜? 니가 우리 반에서 제일 빠른 거 아냐? 난 아직인데. 생리하면 어때?”

나는 아름이보다 더 어린이 된 듯해, 생리 경험에 대해 우쭐대며 얘기했다. 아름이 차례가 되자, 그녀가 한참 뜸을 들였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해 줘.”

“응. 걱정하지 마. 맹세할게. 비밀 꼭 지킬게.”

“우리 엄마는…. 고등학생 때 날 낳았어. 그래서 호적엔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내 부모로 돼 있어.”

잠깐 머뭇거리던 아름이가 말을 이었다.

“지금 엄마는 유부남이랑 만나. 서로 오랜 친구래. 나…. 그 사람을 아빠라고 불러.”

아름이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비밀에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작고 차가웠다.



아름이는 초등학년 6학년 2학기 첫날,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작고 하얗다 못해 투명한 얼굴에 크고 동그란 두 눈. 까만 머리카락, 긴 속눈썹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 같았다. 웃을 때마다 볼에 보조개가 매력적으로 패었다. 우리는 매일 등하굣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순식간에 친해졌다.

아름이의 등장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학교에 단숨에 파문을 일으켰다. 전학 첫날부터 남자아이들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쉬는 시간이면 남자애들은 아름이를 보러 교실 창문에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여자애들에게 시샘의 대상이 되었다. 나 역시, 남몰래 좋아했던 부반장이 아름이에게 고백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녀를 향한 질투심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5학년 때 단짝이었던 은희가 찾아왔다.

“너 요즘 아름이랑만 지내더라. 그런데 애들이 너 보고 뭐라는 줄 알아? 꼭 아름이 공주 옆에 있는 시녀 같대.”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홧김에, 은희에게 아름이의 비밀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말하는 도중에 잘못된 일인 줄 알아 급히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이야기의 단편적 조각들로부터 아름이의 엄마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은희는 눈치챈 듯했다.

나는 불안에 떨며 은희에게 간절히 매달렸다.

“은희야. 이 얘기 못 들은 걸로 해줘. 절대 말하면 안 돼. 응? 부탁이야.”

그 후로, 여자아이들이 모여 수군거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죄책감에 은희 말대로 아름이에게 시녀처럼 굴었다. 아름이가 내가 말한 사실을 알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은희에게 아름이의 비밀을 말한 일을 매일 같이 후회했다.



겨울방학을 일주일 앞둔, 눈이 펄펄 내리던 그 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아름이가 서 있었다. 눈두덩이는 벌겋고 코끝은 얼어 있었다.

“갈 데가 없어.”

그녀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절망과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아름이는 엄마 남자 친구의 부인이 들이닥쳐 집안 물건들을 부수고, 엄마를 때리는 걸 보고 무서워서 나왔다고 했다. 나는 차갑게 떨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는, 소중한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밤, 세상에 우리 둘만 살고 있는 듯 동네 놀이터는 고요했다. 차가운 벤치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아름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옆으로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아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한참을 말없이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바라봤다.

“나 이제 갈게.”

“어디로?” 내가 물었다.

아름이는 말없이 내 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을 기다리는 학교에서 아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름이와는 다시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눈 내리던 그날 밤, 아름이는 자신의 비밀을 새어 나갔다는 사실을 몰라서 내게 올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녀의 눈물 젖은 눈과 떨리는 작은 어깨를 기억한다.

나는 이제 비밀을 지키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날 두 명의 친구를 얻었다. 비밀을 얘기해준 친구,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친구. 누군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날 밤을 떠올린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약속을 지키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든 일이 있을 때 가만히 곁에 기댈 수 있는 친구를 얻는 일이란 걸 안다.


-제16회 2충1효 전국백일장 일반부 장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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