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 집
남편, 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이 깼다. 토요일 아침 7시였다. 남편 혼자 아침상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안방 문틈으로 맛있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난 이불 속에서 최대한 늑장을 피웠다. 한참 후, 막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는 “엄마! 생일 축하해!”라며 두 팔 벌려 뛰어와 날 꽉 안았다. 포근했다. 아이에게 이끌려 주방으로 갔다. 식탁엔 미역국, 밥, 샐러드, 불고기, 콩나물무침, 시금치 무침 등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장미꽃 박힌 초코케이크까지 있는 근사한 생일상이었다. 남편이 날 보고 웃으며 “생일 축하해!”라고 했다. 그러곤 얼른 차린 음식을 맛보라 했다. 미역국을 한술 떠먹어 봤다. 옆에 앉은 남편의 시선이 따가웠다. 오랫동안 익힌 자연스러운 동작을 해야 했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엄지는 높이 치켜세우며 감격스러운 표정과 함께 격앙된 ‘솔’ 톤으로 말했다.
“우와! 어쩜 이렇게 맛있어! 도대체 뭘 넣은 거야? 자기는 음식 솜씨도 왜 이렇게 좋아? 난 참 남편 복 많은 여자야. 잘 먹을게. 진짜 고마워.”
남편이 흡족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남편은 자기 음식엔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겨 더욱 맛있는 거라며 자화자찬했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수원에 있는 전자 회사에 첫 취업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약 8년 정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삼시 세끼를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우리가 연애하기 1년 전쯤, 남편은 화성 진안동에 작은 빌라를 사 기숙사를 나왔다. 우리 부부는 신혼살림을 그 빌라에서 시작했다. 빌라는 남편이 24시간 회사에 갇혀 일만 하고 살아 마치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했으면 살림살이가 이불과 옷가지가 전부였다. 냉장고, 가스레인지도 없었다. 난 임신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스스로 끼니를 차려 먹는 게 막막했다. 그러다 마트 서점에서 『500원으로 밑반찬 만들기』와 『1,000원으로 국, 찌개 만들기』라는 책을 발견해 요리 스승님으로 삼았다. 매일 책에서 나온 몇 가지 음식을 흉내 내어 상을 차렸다. 남편은 고맙게도 맛있게 먹어줬다.
이듬해 봄, 결혼하고 처음 맞는 내 생일이 되었다. 생일날 스스로 미역국을 끓여 먹는 것은 왠지 서럽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선물은 필요 없으니, 미역국을 끓여 달라고 했다. 남편은 서른이 넘도록 라면 이외에 어떤 음식도 해본 적이 없다며 꽤 당황해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요리책을 보여줬다. 그리고 남편이 음식 하는 동안 옆에 서서 하나하나 가르쳐 줬다. 남편이 처음 끓인 미역국은 썩 맛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혼 초라 혀 짧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 이후로 조금씩 남편의 음식 솜씨가 늘어갔다. 요즘은 유튜브에 나오는 새로운 음식들도 만들어 보기도 한다. 난 무슨 음식을 만들어 주던지 언제나 폭풍 칭찬하며 맛있게 먹었다. 이젠 남편은 반주부가 되었다. 작년 봄, 엄마 발목 수술 때문에 3일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아이들과 배달 음식 한번 시켜 먹지 않고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었다. 정말 든든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저녁을 거른 것 같았다. 남편은 퇴근 시간이 늘 일정하지 않고 외식할 때도 많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저녁을 못 먹은 날엔 알아서 직접 음식을 해 먹는다. 잠시 후 군침 도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남편이 TV 앞에 작은 상을 펴 예쁜 접시에 담아 온 두부김치 볶음을 같이 먹자고 했다. 이미 저녁을 먹은 후라 살찐다면서도 소파에 있던 엉덩이는 벌써 바닥에 내려와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남편 음식 솜씨에 놀라 감탄이 절로 난다. 적당히 삶은 두부에 참기름 가득 넣은 김치 볶음을 싸서 먹으니 입안 가득 고소함이 퍼졌다. 그가 있어 맛볼 수 있는 고소한 사랑의 맛이었다.
남편, 잊다. 12년 전 그날 저녁, 난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겨울밤의 신선한 공기가 복잡한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멀리서 노란색 마을버스가 나타났다. 빨리 떠나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버스 문은 천천히 열렸다. 삐-익. 사방을 둘러보았다. 2인석 바깥쪽 한자리만이 비어있었다. 옆 사람이 남자라 망설였지만, 최대한 두 다리를 모아 바깥쪽으로 빼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아이들은 날 찾아 울고 있을까? 남편은 지금쯤 깨진 접시를 치우고 있을까? 머릿속은 뒤죽박죽 괴로웠다. 한숨을 쉬며 창 쪽을 봤다. 순간, 검은 차장 빛에 반사된 옆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빠르게 고갤 돌렸다. 남자의 기분 좋은 냄새와 잘생긴 얼굴 때문일까. 우습게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문득 과거 유명했던 광고도 생각났다. 사람이 붐비는 버스 안, 좌석에 앉은 여자가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수줍게 ‘저 이번에 내려요’라고 했다. 남자는 급히 따라 내리더니 ‘저는 두 정거장이나 지났어요’ 했다. 둘은 설레는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운명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다. 지금 내가 “저 내려요” 해도 당연히 이 남자는 따라 내리지 않는다. 알면서도 묘한 감정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20대의 나는 영화 같은 사랑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사랑은 인위적인 만남에서만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세 번째 연애 상대였다. 둘째 형부가 성실하고 똑똑한 데다 착한 사람이라며 그를 소개했다. 덧붙여 서른이 다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본 요즘 말로 그는 ‘모태 솔로’라고 했다.
처음 만나는 날, 난 검은 벨벳 재킷 아래 체크무늬 짧은 치마로 멋을 냈다. 약속 장소인 부평역 지하상가 중앙 통로 큰 기둥 옆에 키 작고 마른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진한 청바지 위에 검은 목티를 입고 있었다. 짙은 눈썹 덕분에 그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잘 생겨 보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니 향긋한 향이 났다. 떨리는 인사 후, 영화 <내 머릿속 지우개>를 봤다. 저녁을 먹고 술 한 잔씩 마실 동안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만 혼자 주절주절 신나게 떠들어댔다. 내 얘기 중간중간 그는 내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윽한 눈으로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가 싫지는 않았다. 밤이 늦어지자 우린 딱히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도 않고 헤어졌다. 내심 서운했다.
다음날, 둘째 언니가 그가 날 무척 마음에 들었다며 형부에게 여러 번 고맙다고 했다고 했다. 전해 들은 그의 진심에 기분이 꽤 좋았다. 그 뒤부터 그는 내게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날, 마치 공주처럼 귀하게 대했다. “네 생각 때문에 요즘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아”라며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서툰 그의 행동에 설렜다. 우린 만날 때마다 서로의 손을 땀이 나도록 잡고 다녔다. 내 손에 그의 감미로운 향이 배었다. 뭐든 내게 맞춰 주며 섬세히 챙기고 다정했던 그. 그윽한 눈빛, 편안한 체취, 떨리는 몸짓, 따뜻한 손, 부드러운 말투. 연애 시절 내 마음은 언제나 들떠 하늘을 떠다니는 하트 풍선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하트 풍선은 시나브로 쪼그라들었다.
어느새 버스 안은 노래로 가득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요.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은 결혼 후 승진해 바빠지면서 일 년 중 300일 이상은 늦었다. 나와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하숙생처럼 왔다 가버렸다. 낯선 타지에 온전히 아이들과 나밖에 없는 듯해 외로웠다. 그래서 쉽게 그에게 토라지고 예전처럼 날 대하지 않는다고 자주 화를 냈다.
몇 시간 전, 모처럼 일찍 온 남편이 싱크대에 쌓여있던 설거지를 해줬다. 그런데도 괜히 심술이나 나만 하는 육아가 너무 힘들다며 그의 등 뒤에 대고 한껏 악다구니를 해댔다. 남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하라며 헹구던 접시를 그대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몇 발짝 뒤에 서 있던 내게 접시 조각이 튀었다. 발등에 살짝 피가 났다. 난 이참에 본때를 보여준다는 생각에 집을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얼마나 치기 어린 행동인가.
잠시 후, 마지막 정거장에서 모두 내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급히 버스에서 내려 다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타 그에게로 갔다. 뛰지도 않았는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남편, 잇다. 결혼 20주년을 맞는 날이다.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다 서랍장 위 결혼 액자가 보였다. 2005년 6월 5일 예천 농협 하나로 마트 예식장, 우리의 행복했던 순간이 박제된 사진.
난 스물다섯, 남편은 서른 때였다. 우리는 새 생명이 배 속에서 자라고 있어 결혼식을 서둘렀다. 하지만 모아 둔 돈이 없었다. 내가 먼저 남편에게 몇백만 원이나 하는 결혼사진 촬영은 하지 말자고 했다. 결혼식 당일 남편은 내심 아쉬웠는지, 나 모르게 사진사에게 따로 한 장을 부탁했다. 그래서 식에 앞서 얼룩진 회색 천을 배경으로 어색하게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찍었다. 남편은 분홍색 의자에 앉았고 난 남편 왼쪽에 서서 그의 어깨에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을 곱게 올렸다. 젊은 부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유일한 결혼사진.
얼마 전,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안방에서 ‘퍼~억’하며 큰소리가 났다. 깜짝 놀랐다. 안에 혼자 있는 아이가 걱정돼 급히 방문을 열었다. 아이는 태연하게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커다란 액자가 떨어져 있었다. 결혼 액자였다. 5단 서랍장 위 비스듬히 세워두었더니 조금씩 전진해 결국에 낙하했다. 다행히 부러지지 않고 액자 틀과 사진이 분리되어 있었다. 엎어진 사진을 뒤집어 다시 틀에 끼워 넣었다. 사진 속 풋풋한 젊은 나와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다시 결혼 액자를 벽에 바짝 붙여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만약 드라마처럼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이 사람과의 결혼을 다시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을 내게 했다. 수없이 많은 다툼과 미움으로 살아갈 날도 많다는걸, 미리 알았다면. 글쎄. 그래도 난 또다시 그와의 인연을 이을 것이다. 누군가와 이렇게 편안한 관계가 된다는 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기념일 축하해. 나 같은 여자랑 살아 행복하지? 나도 자기 만나서 행복해. 저녁에 일찍 와. 애들이랑 갈비 먹자.’
‘그래’
짧은 답신에 그의 말투가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났다.
- <<처음 쓴 녀자 작품집>>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