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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또 다른 진심을 낳는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에 대해 (에세이글쓰기 수업과제)

by 벨라

떨리는 손으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 공기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왔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따뜻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어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3학년이 된 아들 담임과 상담을 했던 날이었다.

“어머니, 아이가 혹시 주의력 결핍인지 검사를 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어요? 정말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수학 몇 페이지를 펴라고 해도 아이는 멍하니 있어요. 제가 직접 가서 알려줘야 할 때가 많아요.”

집에서도 그랬다. 특히 공부할 때면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멍하니 있어 알아듣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내내 불안했던 그 말을 직접 들으니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1학년 때부터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어요. 병원을 찾아 치료받아볼게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병원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는 드라마처럼 다정한 의사에게 마음껏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었다.

“아침에 먹는 약한 약 두 알 드릴게요.”

“선생님, 아이가 요즘 갑자기 게임을 너무 빠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네, 네. 주말이라 길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약 먹고 지켜볼게요.”

3분이 채 안 되어 진료실을 내쫓기듯 나왔다.

또 다른 곳에서는 나와 아이가 함께 들어가도 내게만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집에서는 어때요?”

아이는 옆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의사는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주의력 결핍과 소아 우울증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태도에 또 실망했다.

그 와중에 더 힘든 게 또 있었다. 속상했던 남편도 나를 탓할 때가 있었다.

“네가 애를 야단치고 공부만 시켜서 저런 거 아냐? 약을 왜 먹어! 너만 바뀌면 되는데.”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아이가 힘들어한다고 자책했다. 그 죄책감 속에서 나는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약만 타면서, 나는 오은영 선생님을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6개월을 기다려 예약한 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한창 출연 중이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러 가는 것처럼 떨렸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 괜히 우울해졌다.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뭐가 힘들까?’ 궁금해하면서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 셋밖에 없었다. 핑크색과 하얀색 벽이 다른 병원과 달리 포근했다.

아이가 먼저 선생님과 30~40분 상담을 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핸드폰에 녹음기를 켰다.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TV로 자주 봐서 그런지 마음속에선 이미 친숙했다. 선생님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내 손을 잡아주셨다. 놀랐다. 하지만 따뜻한 온기에 긴장이 풀렸다.

“어머니, 아이는 참 따뜻한 아이예요.”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셋째를 임신해서 힘든 것도 이해하더라고요. 이렇게 여리고 따뜻한데, 자신의 불편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참고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으셨다.

“아이를 보니 최근 뉴스가 생각나더라고요.”

고참에게 맞으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견디다 결국 세상을 떠난 군인 이야기였다. 그 군인은 사람은 다 착하다고 믿었고, 자신을 때린 고참도 이해하려 했다고 했다.

“아이가 혹시 이런 성향이 생길까 봐 우려가 돼요.”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어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타고난 기질일 경우가 많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쌓였던 죄책감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의 힘듦뿐 아니라 임신한 몸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남편에게 탓을 들으며 견뎠던 내 힘듦까지 헤아려주셔서 감사했다. 이렇게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선생님은 심리상담과 대근육 조절 치료를 약물과 함께 권하셨다. 아이가 세상을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상담을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옆에서 아이가 내 손을 잡았다.

“엄마, 나 선생님 TV에서 봤어! 선생님이 나보고 좋은 아이래.”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선생님처럼 다정히 말했다.

“그럼, 넌 정말 따뜻하고 좋은 아이야.”

그 말을 하자마자 울컥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재우고, 나는 이어폰을 꽂았다.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어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그 목소리에 또 눈물이 났다. 그날부터 힘들 때마다, 또 자책할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버텼다. 죄책감이 밀려올 때면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지금도 선생님은 나의 육아 롤모델이다. 셋째가 “엄마, 또 그거 봐? 그만 좀 들어!”라고 투덜댈 정도로. 어느덧 선생님의 목소리는 내 귓속에 새겨졌다. 이제는 재생하지 않아도 힘든 순간이면 불쑥 들려오곤 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려 애썼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참 따뜻한 아이야.”

“지금 힘들구나. 엄마가 알아.”

아이들이 실수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귓속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아이들을 대하는 순간, 아이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서서히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과의 만남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임신한 몸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왕복 2~3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다른 곳보다 비용도 부담되어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계속 치료받지 못하게 한 것에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선생님과의 만남은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몇 달 후, 아이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발표했어. 떨렸는데 선생님이 잘했대.”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내겐 기적 같았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고 싶었다.


10년이 흘렀다.

벌써 성인이 된 아이는 몇 년 전부터 피아노에 빠져 있다. 한 곡을 듣고 나면 악보 없이 바로 앉아서 연주한다. 몇 시간씩 건반 앞에 앉아 있어도 지루해하지 않는다.

“엄마, 이 노래 들어봐.”

아이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흐른다. 주의력 결핍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저 관심사가 다른 것뿐이었다. 음악 앞에서 아이는 누구보다 집중했다.

어젯밤에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다 가슴이 뭉클했다. 화면 속에서 선생님이 금쪽이 아빠에게 마음을 다해 충고하셨다. 아빠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아빠를 극도로 거부하며 은둔 생활을 이어오던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아이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변하기 시작했다.

진심이 또 다른 진심을 낳았다.

선생님은 지금도 여러 미디어를 통해 나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가르침을 주신다.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응원한다.

그리고 오늘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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