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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소재 : 선물

by 벨라 Feb 28. 2025

얼마 전, 아빠 생신을 맞아 운동화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아빠 발에 맞지 않아 엄마가 신겠다고 했다. 다시 한 치수 큰 거로 보내겠다고 하며 두 분이 커플로 신으라고 했다. 엄마가 무척 고마워했다.

운동화를 고르다 보니 어릴 때 엄마가 사줬던 빨간 구두 생각났다.


엄마는 한 손을 다 펼치고 다른 손 엄지를 하나 더 보탤 만큼 자식을 낳았다. 당연히 여섯째가 귀한 아들이다. 난 서러운 셋째다.

아빠는 학교 소사였다. 덕분에 사택에 살 수 있었다. 낡은 사택은 두 개의 방과 연탄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전부였다. 치매 걸리신 외할머니가 방 하나를 차지했고, 여덟 식구는 남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잤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래서 엄마는 지독히도 아꼈다. 엄마가 일해주던 부잣집에서 버려진 옷, 가방, 신발 등은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 가족의 물건이 되었다. 그러니 난 한 번도 새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시장에 가자고 했다. 나만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을 수 있어 신이 나서 쫓아갔다. 하지만 엄마는 내게 사탕 하나 사주고는 시장 중앙에 멀뚱히 세워 놓고는 사라졌다.

"후딱 장 보고 올게. 넌 여기서 짐 좀 지켜. 응?"

엄마는 장 봐온 검은 봉지를 내 발 앞에 하나씩 쌓아 놓고 사라지며 다시 오길 반복했다. 긴 시간 보초를 서고 나서야 엄마가 내 옆으로 왔다. 속상했지만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엄마는 보상이라도 하듯 신발 가게로 날 데려갔다.

"니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봐."

찬 마음으로 수많은 새 신발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반짝반짝 투명한 큰 보석이 가운데 박힌 빨간 구두를 골랐다. 내 보물 일호가 된 빨간 구두. 집에 있었던 언니들과 동생들은 내 빨간 구두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 모습에 더욱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학교에 가는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빨간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하얀 스타킹 위에 빨간 구두를 신었다. 구두 덕분에 공주가 된 것 같았다.

입학식은 정신없이 금방 지났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무심코 신발장에서 실내화 가방을 꺼냈다. 그런데 가방 안이 텅 비어있었다. 빨간 구두가 없어졌다! 왈칵 눈물이 났다. 가만히 서서 줄줄 흐르는 눈물만 닦아냈다. 우는 날 보고 놀란 선생님이 구두를 찾아 나섰다. 뒤늦게 구두가 사라진 걸 안 엄마도 학교 안을 샅샅이 다 뒤졌다. 내 빨간 구두는 꼭꼭 숨어버렸다.


엄마와 난 말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가 고개 숙이고 걷던 날 멈춰 세웠다. 그러곤 고소한 냄새가 나는 풀빵 봉지를 건넸다.

"먹어. 너 혼자 다 먹어도 돼"

한입 베어 먹었다. 금세 입안 가득 달콤한 팥이 씹혔다. 속상한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풀어졌다.



아침에 막내가 서두르더니 안경을 두고 학교를 가버렸다. 수업 전에 주려고 달려가 아이 교실을 찾아갔다. 목까지 숨이 차올랐다. 그 와중에도 아이 반 교실 앞에서 신발장에 시선이 갔다. 번호 3번. 신발장 안에 익숙한 실내화 가방 속을 열어 봤다. 다행히 아이의 분홍 구두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얌전히 그대로 있었다.


-수필 <언젠가 꽃필 너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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