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ey, 우리공원에 바람좀 쐬러 갈래요?

시어머니을 생각하면서

by 백경자 Gemma

1979년, 고국을 떠난지 12 년만에 첫 방문이었다. 처녀의 신분으로 단돈 50달러와 가방 하나 들고 김포 공항을 떠나왔는데 첫 조국 방문은 가족이 함께한 여행길이었다. 당시 한국은 몰라보게 많이 변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경제개발을 위한 해외 인력 수출과 산업 발전이 있었기에 고국은 그렇게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처음 만난 시집식구들, 친정 식구들, 모두는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갑자기 나타 났을때 뜨거운 반가움으로 맞아 주었던 것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새롭게 떠오른다. 고국 방문시 우리 부부가 처음 한 일은 시집, 친정 식구 모두를 종로 어느 식당으로 초대하여 인사겸 대접을 한 것이었다. 외국에서 결혼식을 치루웠기에 결혼 리셉션처럼 한자리에 모두 모여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서로 사돈간에 만남의 시간을 마련한 것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잊을수없는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으로 머문다.


아이들이 어렸고 외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또다른 가족들을 상견하는 그런 큰 행사였다. 그렇게 조국을 여행하고 돌아온후 나에게는 이제 경자가 아니라 “쏘니아 모” 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모든 서신이나 전화 통화에서 그렇게 불려졌다.


그당시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어머니는 60년 중반에 딸들을 잘 둔 덕분에 비행기를 몇번씩이나 타고 외국을 드나 드셨다고 하나 호강은 커녕 사실은 두 딸을 위해서 고생만 잔뜩 하시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두고온 외 아들을 그렇게도 잊지 못하셨고 또 그 아들 곁에서 남은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평생을 잊지못하는 그 외아들은 두 아들을 잃은 후 불공으로 얻었기에 어머니의 마음에는 일편단심 아들 생각뿐이셨다.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호강도 좀 하셨을 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 내 마음은 지난날의 못다한 효성으로 가슴이 소연해 진다.


어머니는 외 아들에 대한 끔찍한 애착 때문에 막내딸인 나의 결혼식을 서둘러 끝내시고 그토록 고국으로 가시기를 원하셨을까. 다행히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외손자가 태어났다. 우리 아들은 할머니 등에 업혀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내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귀여운 외손자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으시고 집 현관에 나오셔서 딸을 반겨주셨던 기억이 잊지못할 손자의 사랑으로 새겨져있다.


밤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일으켜셔서 딸이 먹을수 있도록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 놓고 기다리곤 하셨다. 우리 아들이 세 살반 쯤 되었을때 건강이 늘 좋지않던 어머니는 병원 출입이 잦아지자 딸을 고생 시키는것을 마음 아파하시고 고국의 아들곁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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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있어 시어머니께서 수십년 보지못한 자식중에 가장 사랑한 아들과 며느리를 보시겠다고 방문차 오셨는데 그때 시어머니의 시력은 5%도 안되는 백내장이란 안 질환을 가지고 오셨다. 며느리가 간호사니 크다란 희망을 안고 오셨지만 한 발짝 밖을 내 딛는 일, 기동이 모두 도움이 필요 한 상태였다. 눈 수술은 시급했고 그때 백내장 수술은 지금 같지 않아서 수술 후 한달씩 요양이 필요했다. 그 기간 동안은 목욕, 빗질, 머리감는 것 까지도 모두 금지 되어 있었으니 에어콘도 없었던 옛날 식 구조의 우리집은 환자와 가족에게 보통 힘든일이 아니었다.


지루한 회복기가 지나 가을 바람이 불어올때 시어머니의 답답함을 안 아들은 바깥 나들이를 위해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을 가자고 제안 해 왔다. 완벽한 어느 가을 날씨에 온 가족과 오랜만에 하는 나들이라 기대가 컸고 흥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를 앞두고 잠깐 휴식차 내린 시계탑 앞에서 시어머니는 화장실 앞에서 거리 조정이 잘 안되어 그만 헛발을 디뎌 발등의 많은 작은 뼈들에 금이 가는 응급 상항이 발생했다. 구경은 커녕 차를 되돌려 와서 병원 응급실에서 6시간을 보낸후 3 개월을 방에서 기어 다니다 싶이 보내셨으니…


내가 감당하기 가장 힘들었던 때, 내 전력을 다해 아이들 돌보는일, 집안일, 바깥일, 병원근무에다 시어머니 간호가 겹쳤으니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집안일을 혼자 감당할수가 없었던 시절에 내 능력과 인내가 한계점에 이르렀고 극도로 지쳐 있었다.그때를 되돌아 보면 힘든 시간들을 용케 잘 견뎌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내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훌쩍 넘은 수퍼 우먼이 되어야 했다. 때론 내 모습에서 웃음이 떠났고, 딸 출산후 나도 모르는 심한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런문제를 헤아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사랑하는 아들을 곁에 두고 싶어하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기에 후회 할일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을 고생한 시 어머니의 그 마음에 아들은 깊은사랑으로 최대의 효심을 해드렸으니 . 우리 어머니는 고생만 하셨고 나는 효도라는것을 해드릴수없는 그런시간속에 떠나셨기에 오래오래 아픈 상처로 머문다. 계시는동안 함께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하시고 고국으로 가셨는데 시어머니께는 더많은 여행도 함께 해드리고 지난세월 못해드린것을 채워드리려고 하는 남편의 효심에는 나도 최선을 다 해 동참했다. 그 반면 내가 우리어머니에게 못해드린것은 더 크게만 닥아 왔으니.이런것들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들로 남아있다.


그 반면 아내의 힘든마음을 이해못한 남편이 나를 오해하는것 만큼 나의 아픔은 비례해서 커져만 갔다. 평소에 그토록 대범했던 남편이 소소한 일에도 예민 해진 관계가 일어나곤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대화이든 주로 밖에서 나누고 들어 오곤 했었다. 시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우리들의 불편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나로서는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평생을 고생만 하신 시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해드리고 싶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국에 돌아가셔서 며느리 칭찬을 많이 하셨다고 하니 그래도 내게는 다소 위안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마음이 아풀때면 남편에게 “ Honey, 우리공원에 바람좀 쐬러 갈래요” 하고 초대를 하곤 했다. 그 넓은 공원과 우거진 숲은 나의 안식처였고 내 터질것 같은 가슴을 품어주던 그런 곳, 나의 모든 아픔을 호소해도 들어만 주던 그런 나의 엄마의 품같은 포근함을 안겨주던 곳. 더욱이 이곳은 우리가 처음 만나서 사랑을 나누던 장소, 내 마음속에 벅찬 그 스트레스가 다 해소 될때까지 묵묵히 안아주던 엄마의 포근한 품이 되어주곤 했다. 그때 잠깐이라도 우리들의 마음에 사랑을 앗아갔고,힘든시간을 경험하게 만들고, 우리 부부의 신뢰를 앗아갔던 그런 시간들,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생각할때 내 자신에게 끝없이 반문하는 마음의 아픔으로 머문다. 나는 한국으로 가신 시어머니을 위해서 평생동안 기도 해드리고 그 영혼이 편히쉬시기를 기도한다. 한국에 가셔서 천주교인이 되어 ‘테레사’라는 성녀명을 받으셔으니 이더한 기쁨이 또 있으랴. 하느님품에 영면하시기를 ...


앞당겨 찾아온 어느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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