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를 생각하면서
바깥에는 조용한 봄비 대신 비 바람이 휘몰아치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오랬 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식사를 간단히 끝내고 신문을 보다가 어떤 지인이 생각이 나서 보던 신문을 덮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몇번의 신호후에 그녀의 창창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긴 공백 후 전화로 듣는 나의 목소리에 상대방 역시 반가움이 역력히 전해왔다.
그런데 그녀는 며칠전부터 나를 생각하고 나의 책이 나가 있는 서점을 친구와 함께 다녀 왔다고 전해 주었다. 아마도 서로의 마음속에 생각을 하다 보니 텔레파시가 통한 것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우린 전화로 만나고 있었다. 하여간 그녀는 그간 생긴 일들을 이야기 하기에 정신이 없었고 예나 마찬가지로 전에도 수차례 들려 주었던 이야기들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늘 그녀에 대해서 지을 수 없는 연민을 품고 살아왔다. 그 이유인 즉, 그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많은 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 과정에서 부 터 이곳에 와서 함께 살아온 삶 말이다. 우리들의 인연은 한국에서 시작됐고 ,누가 만들래 야 만들 수 없는 그런 연속의 관계속에서 헤어 졌다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면서 끊임없이 유지해온 따뜻한 인연의 관계이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옛날 그 시대에 한국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일이다. 네 살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북에서 월남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작은 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엄마와 아빠의 따뜻한 사랑을 덤뿍 받을 나이에 작은 댁 자녀들과 함께 자라면서 작은 어머니의 편애 속에서 어린 시절을 빼앗기고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채 성장했다. 더욱이 요즈음 말하는 정신적 학대라는 것을 무한히 체험하면서 자라온 그녀는 가슴안에 깊은 한을 간직한 채 아내가 되고 또 두아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따뜻한 사랑의 음식을 먹고 온갖 재롱을 부리면서 성장 했을 어린시절을 그녀는 체험해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후에 간호 학교를 거쳐서 정식 간호사가 되면서 서울 시청 근무시절에 우리의 만남이 이루워 졌다. 영등포 보건소가 세계 보건기구(WHO)의 결핵관리 파이 럿 프로젝트 지정소가 되어 그곳에서 내가 일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곳에 결핵 예방접종사로 파견 되어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때 나는 그 관리 팀의 일원으로 함께 잠깐 일하다가 1960후반기에 나는 캐나다로, 그녀는 독일로 조국을 떠나게 됐다.
그런데 몇년후에 토론토에서 어떤 지인의 집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독일인과 결혼을 한 상태에서 이곳에 와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경자씨가 아니냐 고 내 이름까지 기억하면서 반가워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인생항로가 바뀌면서 그녀는 제 이국을 거쳐서 이곳 캐나다에 정착을 하면서 바로 나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린시절 내가 무척이나 힘들 때 마다 그녀를 찾아가면 마음을 열고 나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향긋한 커피와 따끈하게 구워 나온 맛있는 빵으로 나를 대접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그녀의 삶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스트레스 속에서 계속되는 밤일과 삼부 교대일을 밤낮없이 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아이들과 집에서 여가를 즐기고 헬스 클럽과 취미교실에 다니고 있었기에 그런 그녀가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결혼후에 일찍이 찾아온 남편의 알지 못한 어떤 육신의 고통으로 잦은 병원 출입과 이어 지는 척추 수술로 벼랑 끝에 처한 극심한 삶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인생 초년생인 나에게 낯설고 힘든 이민자의 생활은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했고, 새로운 땅에서 만난 구 친구는 나에게 친 자매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나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데 정신적 보조자 역할을 해주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또 긴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공백 시간을 통해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우린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 졌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에서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많은 세월을 읽게 되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사랑하던 남편과 이혼을 하였다고 일러 주었다. 그 세월은 우리에게 긴 세월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잠깐 말을 잃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도 쉽게 이혼이란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면서 여기 까지 왔는데 당신은 그 따뜻하고 좋은 남편과 헤어졌다고요?
나는 그녀가 지금 깊은 숲 속에 남겨진 채 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듯 한 모습을 상상 했다. 그녀의 끊임없이 옛날로 되 돌아가는 전화의 목소리에서 그녀 만이 가지고 있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 H 씨, 그렇게 남편을 사랑했다면 왜 이혼을 하셨나요? 나는 갑자기 이렇게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지난일을 후회 하고 있었기에…
지금 나는 그녀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평생을 조종해온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마음속의 네 살 짜 리 어린아이를 보는 듯했다. 오래전에 읽은 “30 년만의 휴식” 의 저자인 이 무석 정신과 의사의 글이 문뜩 생각 났다. 나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린 아이와 대화를 지금까지 해오고 있었고, 아마도 그 연유 때문에 그녀에 대한 나의 연민은 오랜 세월 떠나지 못하고 살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언젠가는 그녀가 갇혀진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나와 칠순의 성숙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변함없는 창창하고 쾌활한 목소리를 나는 늘 듣고 싶기에 또 우리의 오랜 인연이 그렇게 소중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