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국어도 많이 상실하고 내가 택한 나라언어도 완벽하지 못하니
1967년 12월 23일은 내 삶의 방향 전환점을 그은 날이다. 가족들과 이별도 아랑곳 없이 그날 김포공항의 하늘은 나의 출발을 축하라도 하듯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나의 꿈은 고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가서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벅차 있었다. 그 이후에 닥쳐올 어려움들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장벽의 문을 향한 첫 출발이었다.
내가 언어의 장애인 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직장에서 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실무에서 몰아닥치는 언어장벽, 매일 해결해야 하는 환자 간호에서 오는 스트레스, 앞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물하게만 보였다. 그렇게 수년간 갈고 닦고 자신을 가지고 온 나의 영어 실력은 순식간에 말살해 버리고 매일같이 경험하는 심장고동 소리는 문제가 닥칠 때마다 천둥 치듯 두들겨 됐다.
일터에 나가는 게 무서워 왔다. 또 하루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 속에 하루가 지나고 1 개월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내 머릿속에 저장된 나의 모국어를 소멸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각오를 하였기에 어떤 고난도 나는 이곳에서 감내 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조국에 부모님과 형제 외에 나의 소유라곤 아무것도 남겨두고 온 것이 없었기에 이곳에서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배운 언어인 내 조국어를 삭제하는 작업으로 들어갔다. 뇌에 저장된 언어들을 제거하는데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모국어는 서서히 무의식 속에서 사라져 갔다.
내가 가지고 온 나의 문화를 서서히 잃어가면서 이곳의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는데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듣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이 환자들을 돌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젠 이곳 사람들 처럼
쓰고 읽는데 시간을 모았다.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두뇌에서 번역을 하지 않고도 서서히 하고픈 말이 자유스럽게 쏟아져 나왔지만 대학에 돌아가서 공부를 하려니 또 난간에 부닥쳤다. 이젠 듣는 게 편하니 쓰는게 어렵게 되었으니… 그렇게 나는 언어를 잃고 얻고 하는 긴 세월을 보냈다. 하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누가 나에게 자유롭게 두 언어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느냐고 물음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피나는 투쟁의 세월이 흘렀을까! 이젠 내가 하고픈 일에 특별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동료 간에 부당한 처사가 생겨도 이젠 내 의사를 표시할 언어가 생겼다. 우리 한국환자가 언어로 인해 모욕을 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고 할 때 나는 결코 견디지 못해서 병원에 진정서를 몇 번이나 올렸는지. 얼마나 오랜 세월 나 자신도 이사회의 조직 속에 희생자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서, 생김새가 자기들과 달라 보여서, 이곳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등등으로 오는 그 부당함. 그때 나는 먼 길을 떠났다.
그곳은 온타리오 북쪽에 위치한 기차 여행으로 이틀을 가야 했던 마라 손( Marathon)이란 소 목재 도시였다. 이곳에서 나는 언어에서 오는 내 안식을 찾을 수 있었지만 살아가는 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친구가 필요했고, 누군가 나와 동화될 수 있는 사람과 대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엄청난 고독이라는 무서운 외로움이 나를 서서히 조여 오고 있을 때 일 년이 지난 후 어머님과 언니가 계신 토론토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다리 부상으로 입원한 한국환자의 통역을 같은 병원간호사의 부탁으로 갔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을 만났고 그 갈망하던 대화의 상대로 남편은 다가왔다. 운명적인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평생 우리는 수 없는 만남과 인연을 맺지만 남편과의 인연에서 우리에게 두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우리의 유전인자를 품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가져다준 기쁨, 성장 과정에 안겨준 행복감, 부모의 뜻 데로 바르게 잘 자라 주워서 전문인으로, 효도하는 자식으로 성장해 주었으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바람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주말이면 장거리를 운전해서 사비로 교육을 시켰으나 환경의 탓으로 배운 것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 그네들 역시 엄마의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것
처럼... 부모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처럼 고국 어를 지속시킬 수 있는 환경이 그 시절 그들에게 주워지지 않았기에 배운 모국어를 지속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고 위로을 해본다. 내가 영어라는 언어에 장벽이 있었듯이 아이들에게도 이런 장벽이 있으니 …
지금은 글로벌 시대, 옛날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든 것들이 이젠 필요해지기 시작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민자 가족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이다. 지금 아이들이 두 언어에 능통하다면 더 많은 직업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도 떨칠 수가 없다.
언어란 이렇게 중요하고 의사를 나누는 절대적인 도구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은 한국음식, 한국문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만약에 언어가 능통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보람을 자기의 전문직을 통해서 가질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의 여운을 남긴다. 하나 엄마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면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감사하기만 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 해결을 이 기막힌 언어라는 도구가 해결해 주지만 또 언어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적절하게 잘 사용하지 못할 경우는 모르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는가?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남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아름다운 언어는 삶에서 아픔의 치료사가 될 수 있다.
나는 옛날 지워버리고 잃은 아름다운 나의 모국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서 지금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 모국어가 좋으니 그 속에서 글로 상상의 그림도 그려보고 살다가 가고 싶은데 왜 그것이 그토록 힘들기만 한지… 그래도 또 희망을 가지고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나는 또 도우미 앞에 앉아서 잃어버린 언어를 타자로 찍어내려 가는데 여념이 없는 하루를 보낸다.
2012 09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