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변화에 쫓아가기 힘든 나의 일상
내가 철학교실을 나온 지가 다음 주면 벌써 3 학기가 끝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 속담처럼 이제 나도 각 철학자들마다 쓴 특수용어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용어들의 좌절, 허무, 상처, 혼동이나 칸트의 카테고리 등의 말들이 조금씩 낯설지 않고 들려온다. 이해하기 힘든 것을 떠나서 이제는 그 용어들에 맛들어져 가고 있다.
학문은 아마도 이렇게 우리의 두뇌에 들어오고 정착하여 그것이 내 것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세월이 말해 주는 것 같다. 오늘 강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다음 주면 이번 term 강의가 끝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이 주제를 놓고 글을 한번 써오라는 것이 강사의 제안이었다.
나는 철학이란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불교와 유교 사상이 투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기독교를 만난 것은 내가 간호학 공부를 끝마친 후였고 캐나다에 와서 결혼과 동시에 가톨릭에 입문한 사람이다. 그것마저 입문교육 없이 특혜를 받고 결혼식을 올렸기에 교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거의 없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만 나의 진실이 들어 날 것 같아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지만 이민 생활이 힘들고 장기간 남편의 육신적 고통 때문에 종교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조금씩 익혀가면서 깨닫는 세월이 수십 년이 흘렀다.
남편의 병이 깊어 가면서 그 간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그로 인해 오는 우울증과 정신적 아픔들이 나를 한없이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그때 기독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일어났고 일생에 한번 갈 수 있는 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내 삶에 찾아오셨다. 또 내가 성장한 환경이 “ 남을 해치면 안 된다는 것 ”을 철저히 부모님으로 부 터 배웠기에 그것도 내 철학의 신조처럼 깔려 있었다.
나는 전(Pre) 근대주의, 근대주의,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Post) 근대주의 시대의 물결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급격한 변화 속에 살아왔다. 나는 매일같이 엄청난 테크놀로지의 문화가 가져다주는 변화를 호흡으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살아 가지만 시대 변천을 구분할 수 없이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매일 변화하는 이 시대를 따라갈 수 없는 많은 것들 때문에 때론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앎과 인생관도 전통이 깨지고 가치관이 무너지는 이 새로운 문화로 인해 모두가 소멸되는 듯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 이 시대.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는 시대라 말한다.
짧은 내 인생에 밀레니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0년을 맞이하던 그해 밤 12시에 1999년을 다른 숫자로 바꿀 때 얼마나 세상이 소란했든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첨단의 과학 기술과 변화된 식생활로 평균 연령이 반세기동안 8년이 더 연장되는 장수의 시대가 도래했고, 질병이나 암이 덮치지 않으면 백세을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현실을 맞고 있다. 상상 만으로도 나는 무서운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고령으로 인해 늘어나는 치매환자, 노인들을 돌볼 인구는 점점 개인의 선택으로 나라의 걱정거리로 이어지고, 장수의 시대로 정부의 자금도 바닥을 치고 젊은 세대는 미래를 보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는 한국에 전화를 하려면 기본요금이 3분에 $9.00이었고 매 1분마다 $3.00씩 올라갔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5.00짜리 전화 카드를 사면 600분 동안 국제통화가 가능하고 또 인터넷으로는 그것마저 무료로 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뿐이라!
IT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상상할 수 없는 테크 기술로 버튼만 눌리면 일 초 안에 세계 누구에게도 연락이 가능한 첨단의 시대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루하루를 이 세대에 발을 맞추어 간다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는 숨이 탁탁 막혀온다. 그래서 나도 컴맹을 면하려고 컴퓨터와 싸움해서 이 정도 표현이라도 가능하니 그래도 다행이라 자부한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커다란 거부 반응 없이 뒤쫓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제 강의를 통해서 나는 철저한 실존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존주의자들이 가진 모토가 내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 왔으니 말이다. “인간은 자기를 창조해 가는 존재이며 그 창조를 위해서는 매일같이 해야 할 자신의 선택이 뒤 따라야 한다고” 하는 그 선택이란 단어를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다. 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에게 대한 책임과 타인에게 대한 책임은 누가 내게 시켜서 한일이 아니지만 생활신조처럼 지켜왔다. 아마도 그 선택이란 조건이 없었다면 나의 하루는 혼동 속에서 매일의 삶이 채워졌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후회 없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데카르트( Descartes ,1592-1650)의 말처럼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exist)라는 말에는 너무나 시간의 여유가 없는 인생의 시점에 와 있다. 아마도 나는 본질이 앞선 사고에서 이민을 오면서 실존이 본질보다 앞서게 된 삶을 살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이사회에서 일하면서 인종차별로 소외되는 것도 경험했고 그로 인해 많은 상처도 수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철저히 존재에 가치를 두고 내가 만나는 환자 하나하나를 돌보면서 내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에게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인 면보다 새로운 문화, 언어에 잘 극복하고 자녀들을 두 문화 안에서 이탈 없이 키워내는 것이 내 삶의 최대의 목적이었다고 나 할까… 나에게는 현실이 주는 유행 감각도 느낄 겨를이 없었고 그저 새로운 세계에서 “패배자가 안 되려고 투쟁하는 삶을 오랜 세월 체득해 왔다.
사르트르의 마지막 말처럼” 인류의 극치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매일매일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걸어서 각자의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 그곳에서 기쁜 마음으로 더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나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아는 것이며, 이것이 지혜의 출발이고, 진리에 접근하는 또한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라 하였거늘” 우리 세대가 배워온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는 이 시대. 지금 T.V 에는 지구촌 군데군데에서 수많은 나체의 남녀들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대모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광경을 우리 생애에 목격하게 되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 가! 꿈에도 생각 못한 일들이 이 시대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또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은 현실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를 이탈하기보다 현실과 타협하고 보듬어 않고 이 혼동의 시대에서 오는 문제를 시대적인 도전으로 받아 드리는데 많은 실망이 뒤따른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로 삶아서 나를 창조해 가는 원동력으로 쓸 때 더한 나만의 창조의 길을 만들면서 현실이 주는 삶이 고통이 아닌 지혜로운 끝 마침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늘도해 본다.
2012 06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