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년 차, 남편과 일정을 조율하기가 어려워 혼자 LA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조율하려 더 이상 애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너무 바쁘신 몸이라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여행을 제안할 때마다 마치 빚을 지는 듯한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에도 진절머리 났다. 내가 번 돈으로 직접 계획한 여행인데, 함께 가주는 것만으로도 매번 감사해야 하는 게 지겨웠다. 이번엔 혼자 가련다!
다만 혼자 가는 여행인 만큼 호텔보다는 저렴한 한인 민박집에 숙소를 구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배낭여행객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노는 분위기였다. 우울한 때이기도 했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굳건히 방 안 2층침대에 뿌리를 내리고 거실로 나가지 않았다.
3일째 쯤 되었을까, 아예 언니 한 분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배가 무척 고팠던 참인데 한인타운 LA갈빗집에서 테이크아웃 해오신 게 있다며 같이 먹자셨다.
동굴 밖으로 나갔더니 다들 어서 오라며 반겨주셨다. 그렇게 굳이 주목을 받으며 나가게 된 게 죄송하기도 했고, 맛있는 고기와 캔맥 한 모금이 더해져 즐겁게 인사를 나눴다.
그중 한 남자분이 왜 이렇게 거실로 안 나오셨냐며,
"약간 성격에 이상 있으신 줄 알았어요!ㅋㅋ" 라기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그 자리에 임했다.
여행자들끼리 모인 만큼 사적인 대화보다는 일정을 공유하거나 좋은 장소를 추천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였던 건, 대화가 잘 통하고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모여있다 보니 자연스레 여행 일정을 맞춰 같이 가기도 하고 짝을 지어 놀게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것. 남일이다 생각하고, 인사는 했으니 이제 되었겠지 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보고 성격이 이상한 줄 아셨다는 분이 방 문을 두드리셨다. 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셨다. 본인 친구와 본인,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서 먹자며, 이따 연락해야 하니 전화번호를 물어보셨다. 그때부터 약간 스스로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아 이게 몇 년만이냐만.. 할 때가 아니지! 결혼했다고 언제 말하지?'
셋이서 팬케이크 먹자는데 갑자기 결혼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할 수 있는 건데. 끼니 한 끼 함께하자는 말에 유난 떠는공주병이 될 순 없었다. 썸과 연애세포가 전멸했대도 아무렴 촌스러운 일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바깥에서 택시가 왔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내가 망설이는 걸 느끼셨는지, 이따 1시에 XX해변 앞에서 보자며 휘리릭 나가셨다.
같은 방을 쓰던 분이마침 별 일정이 없다기에 함께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넷이 앉아 음식을 먹는데, 그 브런치 주최자께서 (착각일진 모르겠으나) 너무나 살뜰히 챙겨주시는 게 아닌가. 다음 일정도 함께 하는 게 어떠냐며 본인 계획을 말했고, 번호 교환을 다시 한번 원했다.
먹는 내내 더 늦기 전 언제 '결밍아웃'을 할 수 있을지 기회를 노렸다. 같이 먹고 떠들고 친해질 순 있지만, 일단 결밍아웃부터 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밝히고 편해지고 싶은데 난데없이 돌아가며 결혼여부를 밝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리는 없었다.
그러던 중 각자 시간을 어떻게 내서 온 건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년간 모은 휴가나, 업무실적이 좋아 교육의 기회를 얻어 왔거나, 퇴사 후 결심하고 떠나온 등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했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얘기해야 한다.
"휴가 열심히 모아서 왔어요. 남편도 같이 왔으면 좋은데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안 된다기에 그 사람도 미국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이..남편이 혼자라도 다녀오라고했어요. 구구절저러러러러......."
좌우에서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초혼연령이 40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늘날, 29살에 당연히 유부녀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을 거다.
"헐. 결혼했었어요?"
"아 네, 결혼했어요. 꽤 됐어요. 원래 남편이랑도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는데 구구절절..."
LA 해변 한복판에서 그렇게 몇 번이나 결혼이란 글자를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결혼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를 겉모습으로 어찌 안단 말인가. 나와 남편은 반지도 잘 끼고 다니지 않는데. 이제 와서야 애초에 자유로운 만남과 활발한 교류가 매력인 게스트하우스나 민박집 등의 숙소는 적합하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이나마 겪은 그 '애매함'은 아무 생각 없이 숙소를 택한 내 탓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나의 결혼 여부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을 테고 실제로 묻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구구절절 내 '현재상태' 소개를 들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주책이고 민폐였으며 미안하다.
LA에서 처음으로 '유부녀로서의 응당 고려해야 할 제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나름의결론이라면결혼해도 혼자 LA여행 갈 수 있다!.. 만 게스트하우스는 고민해봐야 한다.가더라도반지 정도는 끼는 게 여러모로 자연스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