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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Nov 29. 2022

스물셋, 본인만 모르는 무적의 나이

바르셀로나 근교 몬세라트를 가기 위해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혼자 다니려 작정한 터라 누구도 다가오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차츰 느껴지는 시선. 그리고 들리는 한 마디.


"혼자 오셨어요?"


대학생이라 하기에도 앳된 얼굴에 자그마한 덩치의 여학생(?)이었다. 나름 용기 내서 말을 걸어준 것 같아 같이 다니자는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온 데다 고도 높은 곳에 올라오니 긴 팔, 긴 바지를 입었음에도 너무 추웠다. 얇은 겉옷과 반바지를 입은 그 친구는 덜덜 떨면서도 사방이 신기한 듯 눈이 반짝였고, 더 높은 전망대에 올라갈 건데 괜찮겠냐는 내 말에도 씩씩하게 따라나섰다.

몬세라트 수도원 전경

아니나 다를까 비에 젖은 돌바닥이 매우 미끄러웠고 푸니쿨라 정류장까지 올라가는 길에 그 친구가 철퍼덕 넘어져버렸다. 황급히 일어나는 무릎에는 금세 피가 맺혔다. 아프지 않다며 과한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일단 카페로 이동해 몸을 녹이기로 했다.




그 친구는 생애 첫 해외여행을 한 달간 스페인, 포르투갈로 무작정 떠나온 23살이었다. 설렘에 차있으면서도 어딘가 한 구석이 불안정하고 들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주 앉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갈라졌던 윗입술을 수술한 듯한 흔적도 눈에 들어왔다. 서클렌즈가 불편한지 자주 깜빡거리는 눈, 동동 떠다니는 피부 화장과 립스틱 색깔, 날씨에 맞지 않는 얇은 옷, 이 모든 것들이 뭔가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추워서 아무도 없던 전망대

몸을 녹인 우리는 함께 전망대에 올라 칼바람을 맞고 내려왔다. 마침 미사 시작시간이길래 둘 다 무교이지만 함께 생애 첫 미사를 봤다.




다음으로 방문한 시체스에서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번에는 내심 혼자 다녀볼까 했으나 주변에서 쭈뼛쭈뼛 눈치를 보는 그 친구의 존재를 감지했다.


결국 혼자 가보려고 골라둔 타파스 집으로 함께 향했다. 화이트 와인 카바와 레몬맥주 끌라라를 주문하고 이름 모를 요리들을 골랐다. 현지인들 뿐인 뒷골목 식당에서 여유롭게 앉아있으니 마음이 덩달아 늘어지는 것 같았다.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나서 자연스레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삶을 설계하고 목표를 달성해온 원동력이 스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평가, 인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요새 깨달았다. 부모님, 친구, 동료 등 모든 이의 '관여'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 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가만 듣던 그 친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꺼낼지 말 지 고민하는 듯했다. 고작 하루 동안 함께했지만 스물셋이라는 귀한 나이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늘이 있다고 느꼈고, 주제넘지만 이유 모를 안쓰러움 까지도 느끼던 차였다. 고민하던 그 친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울증과 사춘기를 쎄게 앓으며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스물셋이 되고 보니 학교도, 대외활동도, 취업준비도 그 어떤 노선에도 속하지 않고 인생을 너무 일찍 놔버린 것 같아 스스로에게 미안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택배 물류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무작정 여기에 왔다.


그리곤 덧붙인 한 마디.


"저는 오히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참견 좀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요."


조금 전 부모님과 타인의 간섭에 질렸다며 어쭙잖은 인생 스토리를 펼치던 내가 약간 부끄러웠다.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어떤 학업과정도 이어가지 않는 딸에게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셨다고 했다. 돈을 벌어 여행을 떠나오는 과정도 옆에서 지켜봐 주시기만 했다고.



"부모님께서 ㅇㅇ씨 의사를 100% 존중하시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방목, 방임인 거 같아요."



하루 종일 느꼈던 그 친구의 그늘은 실재했고 쌓인 답답함과 막막함을 돌파해보고자 본능적으로 여행을 떠나온 듯했다.



이 친구의 눈물을 보고 나니 대입에 실패하고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내 20대가 떠올랐다.


수능에서 역대 최악 성적표를 받았지만 재수하기가 너무 싫어 점수에 맞는 대학에 진학했다. 모두가 비웃는 것 같았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엄마가 나를 창피하게 여기는 것 같다느낌이었다. 인터넷으로 옷을 한 벌 주문했는데 "문디같은 대학서 옷 입어 뭐해." 라던 엄마 말이 사무쳐버렸다. 고집부려 입학해놓고 정작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지 OT, MT, 동아리, 미팅 등 학교 이름 달고 이루어지는 그 어떤 교류 활동도, 단 한 번조차 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광역버스 안에서 소리 죽여 울곤 했다. 내가 선택해놓고 뒤집을 용기는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충동적으로 떠난 서유럽 패키지여행에서 20대 후반~30대 초반 언니 오빠들을 대거 만났다. 그분들은 우연히도 갓 취업했거나, 공채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떠나온 분들이어서 여유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마구 뿜어댔다. 결심을 굳혔다. 나도 언니 오빠들처럼 어디라도 취업하고 행복한 여행을 오겠다고.


대입에서 맛본 좌절감과 패배감을 어떻게든 취업으로 만회해보기로 했다. 치열한 생활의 대가는 매 학기 장학금으로 돌아왔으나 순수한 성취감을 느끼기보다 '돈 안 내고 다니니 덜 억울하다' 라며 비뚤어진 생각을 하곤 했다. 결국 취뽀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들과 축하해주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이제야 인생이 방향을 찾아가는 것 같다며 도취했다.


그리고 10년 후. 그 난리를 치며 들어간 직장에 애정은 바닥나버렸다. 이대로 계속 살 수 없다며 소심하게나마 휴직을 했다.

  

이 동생과 나는 10년이라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같은 고민 선상에 있다. 동생은 학생, 직업인, 취업 준비생 어느 신분에도 속하지 않는다며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대신 사회적 시스템 안팎의 분위기를 모두 경험했으며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거쳤고 한 달 배낭여행이라는 값진 기회도 앞두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80%와 구별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비포장 도로를 선택한 대신 본인의 이야기로 더 치열하게 닦아나가야 한다는 부담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눈 감고도 걷는 나만의 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간의 교집합을 찾아내야 한다. 이게 벌이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일테고. 내 생각이 도움 되길 바라면서 말했다.


"대학 가고 스펙 쌓기 경쟁하고 취업하는.. 관습적 수순에 순종하며 살은 표본이 저예요. 엄마와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 평가가 나를 굴리는 원동력이었고요. 그렇게 걸어왔는데 이 직장은 절대 평생직장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고요. 내 길을 찾지 못했는데 아이를 낳아도 될까, 결혼은 5년 전에 해놓고 이제 와서 고민되고요. 이제 와서 23살로 되돌아간다면 어학연수했던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상상해요. 아니면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것 같아요. 나이 조건에 걸려서 이젠 못 가요.."


두서없는 속마음이 뿌리째 쏟아져 나왔다. 타인을 누구보다 의식하며 살아온 33살과, 자유롭게 방목된 23살은 살면서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할 내 길 찾기를 하고 있다. 내 앞의 친구는 스물셋이라는 막강한 나이로 나보다 앞섰다. 10여 년 전 패키지여행에서 30대 언니, 오빠들이 날 보며 했던 말이 이제 이해가 된다. 자리 잡고 돈벌이하는 모습이 부럽기만 했는데 그들은 내 나이를 들을 때마다 흐뭇한 눈빛으로 엄마미소를 짓곤 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진짜 부럽다~"



내 앞의 친구도 지금이 무적의 나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할 것 같다. '본인들도 지나온 나이이고 겪었으면서 새삼 뭘 그리 부럽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 그래서 마지막까지 주절주절 한 마디를 보탰다.


"혼자 힘으로 떠나온 거 자체가 진짜 대단해요. 그런 추진력이 있으니 절대 안 늦었어요. 남의 길 좀 일찍 가봤자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아요."


헤어지기 전 와인 한 잔 더. 예쁜 사진을 남겨주고 싶은데 날이 흐렸다.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만리타국 수많은 도시들 중 한 곳에서 서로의 인생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연인지는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말로는 혼자 다니겠다 했으나 내심 누군가 다가와주길, 새로운 자극과 배움을 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함께 걷는 연인,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흔치 않게 혼자인 것이 더 없는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외롭기도 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전 날 만난 동행자 언니가 사주신 밥을 이 동생에게 갚았. 타인에게 베푸는 밥정, 내리사랑은 나도 받았듯 부러움과 응원의 뜻을 고루 담고 있나보다. 이 친구도 나도 먼저 살아간 사람들이 그리는 순간에 서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래도 부럽기로는 20대가 넘사벽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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