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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Nov 30. 2022

숙소를 떠나 무사히 기차 탈 확률

이른 새벽부터 나서야 하는 날. 바르셀로나역에서 고속열차 렌페를 타고 세비야역까지 장장 6시간을 내려가야 한다.


며칠 새 더 무거워진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3층 층계를 내려왔다. 마침내 대문이 보인다. 이제 열고 나가면 다신 들어올 일 없는 이 문. 6일 전 여기로 들어올 때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인연을 만날지 기대와 불안을 한가득 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이 끝나버렸다.


숙소를 나와 버스정류장 쪽으로 걷는데 해가 뜨지 않아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다. 스산했고 노숙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비를 들고 거리를 쓰는 주민분들 쪽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괜히 눈도 한 번 마주치면서. 버스를 한 차례 환승하여 탑승할 기차 앞에 도착했다. 준비해온 체인으로 캐리어를 짐 칸에 칭칭 감아두었다. 마침내 좌석에 앉아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행스러움이 있었는지에 대해.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존재들 덕분에


매일 그랬듯 오늘도 새벽녘 숙소 복도에 불이 밝혀져있었고, 열쇠 반납용 상자 또한 제 자리에 있어주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어두운 길을 쓸던 주민들이 불안한 여행자에게 든든한 길 위의 동지가 되어주었다. 제시간에 와준 버스들. 짐을 들고 앉아도 될 만큼 한산했던 버스 안. 큰 캐리어를 실을 공간이 남아있었던 기차. 체인도 평소대로 잘 작동해주었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기차를 탔다는 게 사실관계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들어찬 다행스러움들은 셀 수 없다. 당연한 것은 없으니까.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떠 기차 안에서 폰을 두드리며 이 글을 남기고있는 나 자신도 포함해서. 오늘은 다행 범벅의 날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그런 생각까지 하냐며 피곤해할 남편 얼굴이 떠올라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따 일어나면 괴롭혀줘야겠다.)

나만의 특실, 식당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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