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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Dec 05. 2022

가방 말고 여행 지르는 이유

돈 안 쓴다 한 적은 없다

아직까지 명품가방을 가진 적이 없다. 명품 기준이 모호하지만 돈백만원은 쉽게 호가하고 오픈런을 불사하는 브랜드들로 국한한다면, 아직 없는 게 맞다. 소유한 가방 중 가장 값비싼 것은 엄마가 속 터진다며 사주신 20만 원짜리 코치 브랜드 가방. 본인 또한 환갑 되도록 마찬가지시면서 나를 보며 답답해하실 때가 있다.




명품을 잘 모르는 명.알.못이지만 샤넬, 루이뷔통, 디올 등의 존재는 물론 인식하고 있으며 천정부지로 치솟는 몸 값이 당연시될 정도의 폭발적 유행 시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다만 그 가치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한다. 가치는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 건 어느 부분을 더 중시하고 우선시하는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인데 돈이 주어졌을 때를 가정해보면 바로 드러난다.


300만 원이라는 돈이 주어지고 어딘가에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나는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여행을 택할 거다. 옷도, 가방도, 술도, 화장품도 뭣도 아닌 여행. 지금으로서는 터키나 미국 서남부를 가보고 싶다. 반대로 손에 당장 잡히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 물건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명품은 만져본 적 없지만 국내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하고 직장생활 내내 나를 버티게 해 주는 근간은 1년 전 미리 끊어놓는 비행기 티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외여행 일정 잡아놓고 그날만 보고 '존버'하는 패턴이 코로나 창궐로 인해 와장창 깨져버리기 전까지는. 어느 나라를 가건 수백만 원은 족히 깨지는 해외여행도 분명 비싼 행복에 속한다.




생일, 휴직 등을 기념해 용돈을 주시며 갖고 싶은 걸 사라는 가족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없었다. 스페인으로 떠나왔고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해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휴직자 신분으로서 모아둔 돈으로 여행해야 하니 마일리지를 털어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도 최대한 저렴한 곳으로 잡았지만 열흘 넘는 시간 동안 수백은 우습게 깨졌다.


그럼에도 오길 참 잘했다고, 다시 돌아간대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스페인행을 택하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 첫 순간은 이 광경에서였다.


한 프레임 안에 민소매와 패딩이 공존한다. 이 모습이 너무너무너무!! 좋다. 비로소 여행 왔음을 실감한다. 변태인가 싶겠지만 이유가 있다. 같은 날씨이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나. 나는 추위를 많이 타 11월부터 롱패딩을 꺼내 입어야 했는데, 성가신 건 날씨가 아니라 주변의 반응이었다. '안 덥냐, 벌써 롱패딩을 입으면 한겨울엔 뭘 입냐, 올해 롱패딩 입은 사람 처음 봤다' 등등. 롱패딩이든 경량패딩이든 내 몸에 맞게 입는 것이 옷인데, 타인의 시선에 연연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롱패딩은 12월부터 입을 수 있다'라고 국가 공지가 뜨는 것도 아닌데 왜들 야단일까.


미국 어학연수 시절, 눈 한 톨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건조한 가을에 털로 가득한 어그를 신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뱃살이 다 삐져나와도 개의치 않고 걸친 배꼽티들, 육중한 하체를 밀어 넣은 레깅스들, 괴상한 머리 색깔.. 처음엔 사람들 패션 감각이 없는 건지 갸우뚱하다가 대다수의 차림새가 자유분방하니 어느 순간 개의치 않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나도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바지에 티를 넣어 입다


스페인에서도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우리나라에선 제 발로 방문한 적 없는 ZARA에 들어가 하이웨스트 바지를 과감히 사버렸다. 어지간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지 않는 패션 보수에게 이변에 가까운 쇼핑이었다. ZARA의 나라답게 가격대가 한국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는데 10% 세금 환급까지 해준다. 30유로를 냈더니 훗날 3유로를 칼같이 결제 취소해주는 클라쓰. '빠르게 만들어 빠르게 팔아치운다'는 창업주의 철학에 충실한 나머지 들를 때마다 디피가 바뀔 정도여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자라 본점 (출처 : holaspain.co.kr) / 넓고 눈치 주지 않는 혜자 탈의실
걸어서 스페인 속으로


바르셀로나, 세비야는 그간 다녀본 도시 중 걷거나 자전거 타기에 손꼽힐 정도로 최적인 곳이었다. 10월의 온화한 날씨도 한몫해주어 자라 바지를 입고 걷고 또 걸었다.


구글 타임라인에 찍힌 도보거리는 하루 평균 11km. 세비야에서의 어느 하루는 무려 17km를 걸었다.

일주일 간의 바르셀로나


'유럽의 프라이팬'이라 불리는 세비야 답게 10월의 햇살 또한 어마어마했다. 곳곳에 흰 차양막(?)을 쳐놓아서 그늘 따라 걷기에 수월했다.
스페인광장 근처 공원. 분위기가 너무 좋아 날을 잡고 이 곳에서 책을 읽었다.
걷다 보니 17km 찍은 날

이번에도 가방 대신 스페인 여행을 샀다. 먹고,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수치화할 수 없는 해방감,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자신감도 얻었기에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수많은 기억과 사진들은 곱씹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필요한 가르침을 줄지 모른다. 지나고 나서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자라 바지는 잘 샀다. 충동구매도 성공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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