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던 나의 고요함
사람이 삶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나에게는 그때가 첫 사랑을 만났던 순간이었다.
미국 어학연수 중, 낯선 땅에서 만난 그 사람은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이었고,
처음으로 “이 사람이면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줬다.
그때의 나는 너무 행복했다.
마치 매일이 특별한 날처럼 느껴졌고, 인생이 드디어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딘가 모자라다고 느껴지던 그 감정들이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마치 없었던 감정처럼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거창한 말을 자주 나누진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일 때 나는 내가 되었다.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안도감.
그 감정은 그 어떤 성취보다도 깊은 위로가 되었다.
오늘이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같이 먹은 밥 한 끼,
그 모든 평범한 순간이 나에게 아주 큰 평온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업이라는 이유, 신분이라는 이유,
그리고 너무나도 현실적인 ‘돈’ 때문에 나는 결국 그녀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가족이 걱정할까봐, 실패할까봐,
그냥… 안될 거 같아서…
그렇게 나는 내 사랑을 손에서 흘려보냈고, 시간이 지나도 그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노력도 해봤지만
공허함을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때 그 감정,
그 사람과의 시간을 기준점으로 삼게 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성적으로는 이미 끝난 관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 시간을 살아가는 나.
이미 떠난 사람인데,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하지 않는 나’를 계속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나를 탓한 것도 아닌데, 나는 매일같이 스스로를 책망헸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니?”
“왜 노력하지 않았니?”
“왜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니?”
사실 그 질문들에는 답이 없었다.
그냥… 무서웠던 것 같다. 실패하는 게, 실망시키는 게,
그리고 아무것도 이루는 못하는 내가 될까봐.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려움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으니까.
실패하지 않으면 덜 상처받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현실과 타협하고, “지금은 아니야”라는 말로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쌓일수록, 내 안에 쌓이는 건 ‘후회’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에게서 벗어나지 붙잡혀 있는 것 같다.
떠나보낸 사랑을 후회하면서, 하지 않았던 선택들을 되짚어보면서,
흐르는 시간을 야속하게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더 아팠고,
누구보다 꿈꿨기에 더 무너졌던 시간들.
그때 하지 않았던 시도가,
지금의 나를 가장 깊이 갉아먹고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나는 그 시간을 이렇게 꺼내어 말해보려 한다.
무너졌던 이유를, 놓아버렸던 선택들을,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기억해야 할 감정들을.
그래야만 비로소,
멈춰 있었던 내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