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자와 상호작용하는 '경험의 디자인', 그리고 콘텐츠 경험의 확장
Ⅰ. 반 고흐 미술관이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
Ⅱ. 콘텐츠 경험의 확장과 시각적 즐거움의 극대화
Ⅲ. '모두의 예술'을 위한 경험의 디자인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은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생애를 기념해 건립된 미술관입니다. 고흐의 모국인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위치해있으며, 전 세계에서 고흐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명소지요. 이 곳에서는 「자화상」,「까마귀가 있는 밀밭」, 「해바라기」 등 생전 '불행했지만 위대했던' 한 화가의 대표적인 유화 200여 점과 소묘 작품 5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아낌없는 지원과 지지를 보냈던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와 주고받은 700통 이상의 편지를 소장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2017년 여름, 이 명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의 수, 그리고 고흐의 작품 초기부터 말기까지 연대순으로 큐레이션된 공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고흐의 작품 세계는 물론 그의 생애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유기적인 흐름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쉬이 얻을 수 없는 호사겠지요.
하지만 이윽고 제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이 미술관이 '고흐라는 콘텐츠 유산을 관람객에게 제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식'을 위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디스플레이와 터치 기능을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였어요.
반 고흐 미술관의 오디오 가이드는 단순히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작품과 생전 동생 테오와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연결하고, 이를 성우가 '극화'함으로써 마치 고흐가 감상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내러티브는 개별 작품의 특성이 아닌, 화가 고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특히 감탄했던 부분은 작품과의 상호작용이었습니다. 즉 고흐의 '색'을 설명하면서 관람객이 터치 단말기를 통해 몇 가지 색을 조합하여 해당 색을 재현한다거나, 디스플레이에 초상화를 터치로 지우면 실존 인물의 사진이 등장하는 등의 다층적인 경험이 그것입니다. 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유화의 특성을 설명하며, 과거와 현재의 색감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근대적 의미의 미술 감상, 즉 '일정한 교양을 갖춰야만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경험'이 아닌, 배경지식이 없더라고 쉬이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고흐의 작품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감상자는 수동적으로 작품에 대한 정보를 받는 것이 아닌,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작품과 감상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입체적인 경험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콘텐츠 경험의 확장'은 미술관의 공간, 그리고 그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위해 반 고흐 미술관은 명품 브랜드와 콜라보를 시도하거나, 일상 용품이나 스낵 브랜드와 함께 하거나, 유튜브 오리지널 콘텐츠로 일반 대중에게 다양한 콘텐츠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고흐의 핵심적인 콘텐츠, 즉 '그림'을 '시각적 경험의 극대화'로 확장한 것은 단연 2017년 개봉한 영화 「Loving Vincent」입니다.
영화 「Loving Vincent」는 62,450장의 유화로 완성된 고흐의 전기 애니메이션입니다. 실사 영화로 촬영한 뒤 그것을 고흐의 화풍을 입힌 유화로 모조리 그려낸 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죠. 이 영화는 10년에 걸친 제작 기간 끝에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Best Animated Feature Film'을 거머쥐었습니다. 감상자는 이 영화에 담긴 풍차의 움직임, 바람에 파도치는 밀밭, 흔들리는 불빛, 인물들의 표정, 몽환적인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빛을 감상하며 고흐의 유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 안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던 고흐의 그림이 '영화'라는 옷을 입고 스크린에 담긴 것입니다.
이 지난하고도 위대한 작업을 오랫동안 후원한 것은 반 고흐 미술관입니다. 반 고흐 미술관의 관장인 악셀 뤼거(Axel Rüger)는 이 영화의 대본과 기획을 승인하고, 2014년부터 이 영화를 후원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 고흐 미술관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고흐와 고흐의 작품에 대한 풍부한 전문 지식과 자문을 제공했지요. 이와 같은 '콘텐츠 경험의 확장'에 대한 반 고흐 미술관의 의도는 악셀 뤼거의 공식 성명서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이를 약간의 의역을 첨가해 옮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 고흐 미술관의 사명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작품과, 그의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센트의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이 혁신적인 접근법에 박수를 보냅니다. 도로타 코비엘라(Dorota Kobiela)와 휴 웰치만(Hugh Welchman) 감독의 영화, 걸작 「Loving Vincent」에 매우 만족합니다.
「Loving Vincent」는 수년간의 헌신과 노력의 결실이며, 반 고흐 미술관은 2014년부터 이 프로젝트를 지원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의 연구와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전문 지식을 쏟아냈습니다. 이 영화의 첫 20분 정도의 분량이 우리 미술관에서 '미리 보기'로 상영되었고, 그 후에 방문객들이 영화의 제작자들에게 질문을 던질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영화 「Loving Vincent」가 세계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Loving Vincent」와 반 고흐 미술관의 상호 홍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반 고흐 미술관은 「Loving Vincent」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편지, 그리고 그의 격동의 삶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우리는 또 다른 영화 제작자들과의 새로운 형태의 협력을 모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 고흐 미술관의 '다층적이면서도 입체적인' 미적 경험의 설계는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미술관에서 작품과 감상자 간의 상호작용이란 '작품의 일방적인 제시', 그리고 '감상자의 일방적인 응시와 해석'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반 고흐 미술관이 보여주는 미적 경험의 변주는 감상자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또 미술관 밖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작품과 만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지점에서 감상자는 과거와 같이 회화나 조각을 응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금인출기처럼 카드를 넣고, 빼고, 번호를 누르며, ‘반응’을 요구하고, 서비스를 받는 방식으로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감상자는 미술관이 전시해놓은 작품들을 관찰하며 작가정신과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양식을 통해 시각적 유희를 즐기는 것은 물론 예술가와 작품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미적 경험의 설계’는 궁극적으로 작품의 존재형식마저 변화시킵니다. 이제 감상자는 오디오 가이드나 스크린은 물론 다채로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접하고, 그것을 ‘터치(Touch)’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술 작품’이 '완결된 상태로' 감상자에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또 다른 생명력을, 감상자는 입체적인 미적 경험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의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연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예술'을 실현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