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남'을 향해 행해지는 '폭력의 구별 짓기'
고대 그리스 사회는 신화에 등장하는 켄타우루스(Centaurus)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판타지 영화나 게임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상상의 생명체. 그리스 신화에서 말 그대로 '괴수'로 그려내는 존재. 이들은 야만적인 종족이지만,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에 의해 거의 몰살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켄타우루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마병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의 침공 이후에 더욱 정교화되었다고 한다. 덧,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페르시아를 켄타우루스와 동일시하여 두려움의 존재이자 야만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이성의 테세우스(그리스)를 감성의 켄타우루스(페르시아) 보다 우위로 놓는다. 그렇게 형체가 불분명하던 켄타우루스는 '나와 다른 것'이라는 위치를 얻고 선명해진다. 나는 '문명'이 되고 나와 다른 것은 '야만'이 된다.'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 이것이 카노바의 조각이 담고 있는 메시지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되고 넌 타자(他者)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화(他者化)는 때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나의 심리적 안위를 위해 다른 이를 두려움의 존재, 혹은 열등의 존재, 자세히 알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든다.
고대를 지나 중세가 도래했다. 기독교와 신의 세계였던 중세. 이 시기의 타자화는 주로 기독교 이외의 가치관을 이단으로 몰고, 여성을 사회의 희생양으로 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신을 위한 것이었던 시대, 타자화는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는, 또는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폭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이슬람은 '악마'가 되었고,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꾸준하게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은 '마녀'로 몰려 '사냥'을 당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 강화와 영주들의 영토 확장이라는 목적도 있었고, 마녀사냥은 주로 생산력이 거의 없었던 나이 들고 과부였던 여성들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목적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 경제적인 목적, 사회적인 목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폭력이 신의 이름으로 '나와 다른 남'을 향해 행해졌다.
중세가 무너지고, 근대가 도래했다. 기독교라는 신은 죽고, 이성과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삶은 더욱 윤택해지고, 모두 근대를 칭송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런 좋은 가치들을 모르는 문화권은 참 안타깝다. 그래, 그럼 우리가 가서 가르쳐주자.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허울 좋은 껍데기였다. 식민지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군사적 무력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기도 하고, 경제 침투를 통해 식민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르침의 대상'에게 말한다. 우리의 근대가 이룩한 이 가치를 보라. 너희는 아직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지 않느냐. 우리의 신인 이성과 과학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이 부럽지 않은가. 우리는 너희들에게 이 근대화가 가지고 오는 윤택함을 나누고, '공동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 너희에게 왔다.
하지만 이는 형언할 수 없는 폭력을 낳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하나 된 아시아를 외쳤지만 그 아시아는 '일본에 의해 계몽된 아시아'를 의미했고, 찬란한 태양을 상징하는 일본의 국기는 비인간적 폭력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치는 '위대한 아리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독일 국민 마음속에 심기 위해 유태인을 열등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몰살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타자화를 통한 폭력은 매우 잦았다. 오늘날이라고 다를 리 없다. 여성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타자화의 대상이 되어왔고, 동성애, 제 3세계 역시 이 폭력의 희생양으로 남아있다. 때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조금씩 변하긴 했지만, 그 틀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사가 반복되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 타자화는 무슨 이름으로 행해지든,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이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혐오의 언어와 타자화를 통한 폭력은 '허울 좋은 이야기'들로 덧씌워진다. '고통분담', '국가안보', '경제위기 타파', '여성 상위시대가 아닌 진정한 남녀평등으로' 등. 이를 통해 같은 사회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다층적인 차별과 폭력을 균일화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질식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타자화와 폭력이 사회를 진보시킨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인 사고',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접근은 화자의 의지대로, 또는 화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력의 일상화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많은 이들이 이를 무기로 '나와 다른 남'을 공격하고, 이를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로 포장한다. 그 자체가 야만스러움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