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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털풍뎅이 Mar 12. 2022

찌질한 아저씨의 실패담 메들리(2)

대학 졸업과 IMF

아, 나는 이런 일 한다.


요즘 나는 책을 만든다. 그중에서도 그림책을 만든다. 

책을 만들겠다고 출판사를 차린 것이 한 3~4년 전쯤이었다. 필자는 출판과는 전혀 다른, 출판 비슷한 일도 해본 적 없는 출판계의 완전한 뉴페이스였다. 주책맞은 다양한 헛발질과 삽질을 선보이며 이제 몇 종의 책을 출간하고 이제 출판계의 어엿한 ‘햇병아리’쯤 되었다. 나이는 중닭을 지나 노계에 가까우나 여튼 그렇게 됐다. 제정신이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다.


사나이 가슴에 큰 뜻을 품고(사실 필자 같은 소인배에게 그런 거 있을 리 없다.) 책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출판계에 몸담고 있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앞다투어 뜯어말렸다. ‘책이 느므느므 안 팔려서 느므느므 어렵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책으로 먹고살면서 나 보고는 어렵다고 하지 말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필자 같은 다크호스가 두려워 미리 견제 들어오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맘대로 시작했고, 이제는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말을 뼈에 새기는 중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던져진 주사위고 엎질러진 물잔이다. 물러서면 절벽이다. 무라도 베야 했다.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그런 거는 꽁꽁 숨기고 뭐라도 꼭 베어야 했다. 

출판사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뭔가 인텔리스러운 있어빌리티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렇지 사실 출판사의 살림살이라는 게 참 별거 없이 초라하다. 훌륭한 곳도 많겠지만 필자네는 애당초 자본이라는 것은 1도 없이 출발하다 보니, 작가의 섭외라든가, 편집이라든가 책의 디자인이라든가, 제작이라든가 하는 모든 부분에서 허덕거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에게는 적정한 인세를 지급해야 하고, 편집과 디자인도 전문 인력에게 걸맞은 인건비를 지급해야 한다. 종이의 구매와 인쇄, 제본의 일련의 작업 역시 돈이 들어가야 책이 나온다. 그렇게 만든 책이 서점으로 나가 팔려야 한 달 후, 혹은 넉 달 후부터 비로소 비용이 회수되는데, 그것도 이것저것 제하고 들어오다 보니 숫자가 참 볼품없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서점의 신간 코너에 진열되어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2주 정도밖에 안된다. 그다음엔 서가로 들어가고, 그래도 안 팔리면 반품으로 들어온다. 책이 알려져야 판매도 될 텐데 독자를 만날 기회는 늘 부족하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재고는 책상태를 불문하고 반품을 받아야 하는데, 양장제본을 하는 그림책은 대부분 책이 상해서 돌아오기 때문에 거의 폐기한다. 책 한두 종으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물 밑으로 온갖 쌩쑈를 다해야 하고 물 위에선 고고한 척 큰 거 쥔 척, 센 척해야 한다.

그래야 작가들도 안심하고 원고를 맡기지 않겠는가. 그래야 서점에서도 우리 책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지 않겠는가.


어쩌다 동문회에 가는 날이면 아무개네 아파트는 몇 배가 뛰었다더라.’, ‘아무개는 회사에서 무슨 차를 받았단다.’, ‘요즘 골프장은 어디가 대세란다.’는 건너편 친구들(이라고 쓰고 아는 사람이라고 읽는)의 근황 얘기들이 기어코 내 귓전까지 쳐들어와 속을 긁어대곤 했다. 

‘으이그 속물들. 돈이 다냐?’하며 공연히 꼬인 심사를 뱉어내도 내 인생만 초라해 보이는 건 어찌 못할 일이었다.


나이는 과도하게 먹었는데, 친구들은 안정되어 보이는데, 남들 일할 때 나라고 딱히 따로 놀았던 것 같지도 않는구먼, 도대체 내 인생은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일을 안 키웠네.’

 산전수전 공중전을 한국시리즈 마냥 시리즈로 겪으면서 비즈니스의 이치를 몸으로 터득한 선배형이 선문답스런 한마디를 던졌더랬다. 무심코 던진 그 한 마디가 묵직한 돌직구로 들어왔다. 그동안 살아온 궤적을 돌아보니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

시작도 늦었으며 독립도 늦었는데,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앞뒤 없이 달려들던 천둥벌거숭이가 보여 부끄러워졌다. 



IMF와 LCD


필자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가 터졌다. (대충 나이 나온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가 고속 성장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던 터라 지금보다는 일자리도 많았고 대우도 좋았다. 적당히 학점 관리하고 졸업하면 큰 하자가 없는 한 웬만한 회사에 입사해서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안정감, 기대감이 있었기에 외환위기가 몰고 온 사회변화는 평생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순백의 순결한 지식을 뽐내던 필자에게도 외환위기의 후폭풍을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수렴하는 일이었다. 

대기발령과 입사 취소 같은 흉흉한 소식들은 구조조정에 명예퇴직 같은 더 숭악한 소식에 덮였다. 

건실하던 회사들은 줄지어 도산했다. 졸업은 했어도 진로가 결정되는 친구들이 없었다. 이러한 판국에 학점 3.45 짜리 인문대 졸업생이 취직을 바라는 건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도 답도 없고 덧도 없는 일이었다. 


 '독수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파리를 잡아먹지 않는다.’ 
 

정치를 지망하던 한 선배의 ‘민족문제연구소’ 창업의 변에 크게 감명받은 필자는 취업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안전한 이불속에서 힘을 길러 후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불속 칩거를 이어가던 필자를 깨워 알바의 세계로 이끌어 준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필자의 누이의 남자 친구 되는 분이었다. 필자의 누이를 사랑하는 범 인류애를 실천하며 우리 집에 데뷔한 그는 단군할아버지 이래 최악의 환란 속에서도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무려 1인 기업을 시작하는 패기의 능력자였다. 


  노트북이나 모니터, 혹은 TV에 들어가는 LCD(리퀴드 크리스털 디스플레이, 우리가 액정이라고 부르는 그거)의 제조장비들을 대기업에 판다고 했다. 이제 곧 집집마다 TV를 벽에 걸어두고 보는 세상이 올 것이고 자기 사업의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다며 필자의 모친에게 어필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실제로 10여 년 후, 그는 정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의 과도한 의욕은 당사자의 취향이나 적성은 무시한 채 필자를 그 회사의 알바로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과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필자를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로 개조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며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필자는 순결한 인문대생이었다.) 

전화받고 메일 쓰고 룰루랄라 가볍게 일하며 용돈이나 벌자 마음먹었던 필자는 그때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LCD 제조공정은 반도체 제조공정이랑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반도체를 만드는 대기업들은 웬만하면 LCD 제조라인도 함께 키우고 있었다. 기흥이건 수원이건, 이천이건 천안이건, 구미건 양산이건. 출장이 있는 날은 공장 출근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했다. 기흥이나 천안은 그래도 차를 타고 내려가니까 괜찮았지만 구미나 양산에 갈 때면

 
       1) 새벽에 손님을 호텔에서 픽업해서 
       2) 택시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3) 새벽 첫 기차-당시엔 새마을 호가 제일 빠른 기차였다.-를 타고 가서 
       4) 다시 택시 타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긴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비행기를 타고 공장에 가는 날도 있었다. 

비행장에서 난생처음 헬리콥터로 갈아타고 엄청 신나 하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추운 겨울, 새벽 기차 타고 졸았던 기억만 새록새록하다. 

공장 미팅에는 주로 일본 종합상사의 영업맨들이나 독일, 일본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참석했다. 논의되는 이슈들이 거의 기술적인 내용들인 데다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다 보니 필자에게는 이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필자, 문과라고 두 번 말했다.)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면 참 좋을 텐데, 센스는 자동차 이름인 줄도 모르는 외국인 엔지니어들은 웅얼거리는 영어 발음으로 자기 할 말만 빠르게 해 버리고 뒷일은 필자에게 넘기는 만행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못 알아듣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고객들은 그에 대한 질문은 꼭 동포인 필자에게 물어왔다. 

이때야말로 고객들에게, 또 고용주인 사장님에게 필자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자존감을 드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시에 쪽팔려 죽게 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미팅 시간엔 언제나 초긴장상태였고 한 겨울에도 원적외선 불가마에 들어앉은 것처럼 땀을 비 오듯 흘리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곤 했다.


그렇게 사전을 뒤지고 일본어를 공부하고, 기술적인 내용은 엔지니어들에게 물어가며 서당개가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을 몸소 체험하고 증명하기에 이른다. 사장님은 놀랍게도 필자의 기술적인 이해도와 외국어 이해능력, 업무스킬을 끌어올리는 기적을 행하시었고 월말이면 바짝 마른 필자의 통장을 촉촉이 적셔주시기까지 했다.


한 두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거 빼곤 ‘이렇게 인생의 봄날이 오려나 봄’ 했다. 

한 가지는 불안한 신분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나고 새로운 후임 직원들이 입사했는데도 필자의 신분은 여전히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남동생이라는 특수관계를 걷어내면 새로 들어온 직원들보다 훨씬 약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그 특수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듯한 불길한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얼마 후 연애관계를 청산하고 남남이 되기에 이르렀다. 사장님은 ‘그래도 우리는 형제’라며 너그러운 소리를 했다. 하지만 필자와 사장님의 특수관계도 끝난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일이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특수관계를 아는 사람들의 안부인사가 불편했고, 필자의 눈에 사장님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심지어 급작스러운 모친상을 당한 필자는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아름답게 발전시키고 밝은 미래를 도모하는 것은 무척 힘들어 보였고, 필자는 그럴 의욕도 의지도 없었다.
 자의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미련도 없어졌다. 급격히 피곤해졌고 진력이 났다.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와 삼 박 사일을 앓았다.
 

미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 길이 필자의 운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을 필자의 것이라고 ‘절실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특수관계를 의식했고, ‘특수관계에 의한’ 특권을 은근 기대했던 것이 이런 시시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관계보다 일에 애착을 가졌었다면 훨씬 더 치열하지 않았을까. 필자의 의지로 필자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다른 기회도 있지 않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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