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1로 해주세요.
중고등학생 때는 똑같은 교복을 입었고, 급식 메뉴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학업 외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대체적으로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 나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별생각 없이 무난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출근길엔 무엇을 입어야 할지' , '점심시간엔 무엇을 먹어야 할지'와 같은 사소한 것들조차 고민과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깨달았다.
두 개의 고민만으로 1년 동안 '고민과 선택이 필요한 것'의 수가 0에서 순식간에 400여 개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직장인이 되어서야 예상보다 더 많은 고민과 선택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입지 뭐 먹지 고민은 거들뿐)
고민과 선택이 반복되면 어느 날은 선택 장애의 순간이 오고 만다.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지는 그 와중에도, '잘' 선택하고 싶은 나는 더 많은 선택지를 살펴보려 결정을 미루기로 한다.
요즘 그 선택권에 대한 과부하 상태였고, 가끔은 멍 때리는 얼굴로 서성거렸다. 괜찮냐는 질문에 "괜찮아요." 같은 로봇 멘트를 날리니, 의심을 품은 동료 A가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멈칫멈칫하다 커피를 마시면서 가볍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커피 가게에서도 어떤 커피를 마실지 고민이 됐다.
메뉴를 고민하기 위한 잠깐 정적이 흘렀고, 금세 또 고민에 빠졌다.
나 :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흠 처음 들어보는 메뉴들이 정말 많네. 뭘 마시지.. 목이 마르긴 하는데 비도 오니까 따뜻한 것을 마셔야겠지, 아 커피는 바닐라라테가 제일 좋지만, 곧 점심도 먹으니까 간단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셔야지.')
직원 : " 원두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1번은 콜롬비아로 어쩌고.."
나 : "음..." ('아.. 옵션 같은 건가. 무슨 원두를 선택하는 거지. 산미가 강한 건 잘 못 마시는데...')
A : " 아, 옵션 1로 주세요. "
나: "...!? "
잠시 후, 인터넷 설치 때문에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통화 내용이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을쯤...
직원 : "고객님, 인터넷 설치 전에 선택하셔야 하는 항목이 있는데요..."
A : "네, 옵션 1로 해주세요."
나: "...?? " ('심지어 옵션 1이 뭔지 듣지도 않았어...')
A : " 인터넷을 설치할 때도, 옵션별로 생각보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어요. 모든 설명을 듣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어요. "
인터넷 설치가 복잡하다고 마음의 짐으로 두고 미루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었다.
문득, 내가 나중에 잘하려고 묻어둔 '해야 하는데' 리스트는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A: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해요. "
앞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면
해결할 수 있는 범위까지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그 외의 문제는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
'옵션1' 덕에 깨달았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쯤 우연하게 '선택의 역설'이라는 TED 영상을 보게 되었다. 많은 옵션을 보고 선택해도 기쁘지 않았던 이유. 공감이 되어 남겨보고 싶다.
선택의 역설 중.
"100가지 스타일로 나오게 되면 그중 하나는 완벽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고른 것은 좋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고른 것과 예상한 것과 비교하게 되고 제가 예상한 것보다 실망하게 됩니다. 사람의 삶에 선택을 더 주는 것은 사람들이 그 선택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좋더라도 덜 만족을 하게 만듭니다."
http://www.ted.com/talks/barry_schwartz_on_the_paradox_of_cho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