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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Sep 04. 2023

<오펜하이머> 선택과 결과의 딜레마에서

흠많은 개인이자 뛰어난 리더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본다. 원작을 읽은 것, 유투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전쟁 관련 영상을 보며 새로 알게된 것, 자연스레 파생된 곁가지들의 조합이다.



1. 평전「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그리고 영화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정확히는 특별판 1000여 쪽 중에 100쪽 정도를 먼저 읽고, 나머지 분량을 영화를 다 본 뒤에 읽었다. 영화에서 청년 오펜하이머의 부모님이나 성장배경 등은 생략되어 있는데 마침 100쪽까지의 분량이 청년기의 내용이었다. 영화에서 스쳐가듯 나오는 T.S 엘리엇의 시집, 피카소의 그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등을 오펜하이머가 왜 향유하는지, 하버드에서 케임브리지로 온 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청년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감정에 더 이입할 수 있었다.


영화는 대체로 평전의 내용을 충실히 담아냈고, 영화적 상상력과 실존 에피소드를 감독의 스타일대로 재구성해 영화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재미까지 둘 다 담아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 이번 <오펜하이머>도 컬러와 흑백 교차 구성에 대사도 많고 인물도 많아 인물과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한 번에 내용을 쫓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묵직한 사운드가 심리적인 압박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준다.


***책과 영화를 비교하자면, 책이 더 재미있었다.

***물론 영화적 서사 측면에서 이야기해 볼 요소도 많다.

(컬러(오펜하이머)와 흑백(스트로스)의 시점 전환, 오펜하이머의 서사는 원자폭탄에 비유되는 핵분열, 스트로스의 서사는 수소폭탄에 비유되는 핵융합, 오펜하이머의 원자력에너지위원회 보안심사 청문회와 스트로스의 상무부 장관 임명 청문회의 대응구조라든지, 물리적 의미의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관계 등등)



2. 오펜하이머는 어떻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한 그룹의 리더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경력 정도는 흔하게 갖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정작 프로젝트 리더인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 경험이 없다. 지도 교수를 독살할 마음을 먹을 정도로 불안정했던 오펜하이머의 청년기와 옛 애인을 비롯해 공산당, 사회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맥들을 생각했을 때, 국가 기밀을 다루는 비밀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적합한지도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결국 전후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닥쳤을 때, 오펜하이머에게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오펜하이머를 선택한 그로브스 장군의 혜안도 뛰어났지만, 한 개인이 이토록 새로운 환경과 위치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역할에 대해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각자의 개성이 뛰어난 물리학자들을 어르고 달래 가며 (실제 오펜하이머의 성격은 자상함보다는 오만함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낸 듯하다. 그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다거나 인간적으로 아량이 넓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누구나 자신에게 잘 맞는 역할과 환경이 따로 있어 보인다.


청년기에 대한 평전의 설명에 따르면, 실험보다 이론에 강했던 오펜하이머는 실험 물리학 중심의 영국 케임브리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이 시기에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이론 물리학 중심이었던 독일 괴팅겐에 갔을 때 (물리학 외에도 가풍의 영향으로) 음악과 문학,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오펜하이머의 교양지식은 더욱 폭넓은 인맥과 함께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너는 물리학도인데 어떻게 예술도 알고 있니?' 하면서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영국보다 독일에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만약 독일에서의 유학을 통해 소위 '인싸'가 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맨해튼 프로젝트의 오펜하이머도 없었을 일이다.



3. 윤리적인 딜레마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원자폭탄 투하 덕분에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히로시마 이후 나가사키까지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시선이 많았나 보다. 평전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미국 정부는 일본이 항복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일본의 항복을 확실히 받아내고자 2차 투하를 지시한 것으로 기술된다. 좋은 전쟁, 나쁜 전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군비 경쟁 확산을 경계했던 학자들에게 어디까지나 원자폭탄과 같은 위험한 개발물은 필요악으로만 존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 정치는 냉정하다. 모두가 평화롭게 이상을 지향하며 살아가기엔 그마저도 이용해 먹는 세력들이 있고, 무력이든 자본이든 힘의 논리에 따라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은 불편한 역사를 경험한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도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이미 1년 넘게 전쟁을 하고 있고, 아직까지 크고 작은 내전으로 고통받는 나라들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인민들이 굶어 죽는 북한도 핵무기를 만든다 하니, 모두가 동일한 이해관계에서 신무기 개발도 없이 비폭력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미래는 신기루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ㅡ여담이지만, 전쟁을 멈추기 위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팩트 외에 영화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판단은 없다. 일본이 나치만큼 나쁘다든지, 일본이 동아시아에 해악을 끼치고 태평양 전쟁의 원흉이니 혼줄을 내자라든지 이런 시각은 없었다. 영화에서 원폭을 투하할 도시를 결정하는 장면에서 나온 '교토는 신혼여행으로 다녀왔었는데 문화유산이 많은 도시니 제외하자' 같은 대사를 보면 전쟁을 종식할 본보기가 필요했을 뿐이지,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감정은 전쟁 중에도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ㅡ


ㅡp.s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이슈는 말콤 글래드웰의「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 다룬 도쿄대공습에 관한 논쟁이 더 이야기할 내용이 많을 것 같다. 도쿄대공습을 앞두고 핸셀의 정밀폭격 VS 르메이의 지역폭격 논쟁이 있었는데, 정밀폭격은 말 그대로 주요 군사시설을 타겟팅해서 공격하는 것, 지역폭격은 그 일대를 함께 공격하는 것이다. 제트기류 때문에 정밀폭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운 자연 제약이 생긴 와중에 민간인은 물론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지역폭격을 감행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ㅡ결과적으로 지역폭격을 감행했고, 소이탄의 일종인 네이팜탄(3,000도 이상 열을 뿜고 몇 시간을 계속 탄다. 베트남전에 쓰였다가 현재는 금지된 무기 중 하나다.)을 이용해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도쿄 일대를 모두 불태워 원자폭탄보다 피해가 더 컸다. 일본은 자국민의 사기가 떨어질까 도쿄에 화재가 났을 뿐이라며 사태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았고, 1억 총옥쇄를 주장하며 나라를 위해 온 국민이 몸 바칠 것을 외쳤다가 두 번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 선언을 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가 시간을 다시 되돌려 과거로 돌아간다면 선택의 순간에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 같지는 않다. 비록 부적응의 시기가 있었지만 계속 물리학을 탐구했을 것이고, 공산당원이 되지는 않았지만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부나 학생들의 권리와도 직결되는 노조활동에 찬성했을 것이고, 진 태트록을 사랑했을 것이고, 키티를 만나 가정을 꾸렸을 것이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았을 것이고, 원자폭탄으로 희생될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가졌을지라도 폭탄 투하를 주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개인 사생활까지 낱낱이 파헤쳐지는 굴욕스러운 순간마저 견뎌내며 오펜하이머가 보안 심사 청문회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후회와 번민에 휩싸이다 보면 끝이 없다. 당사자의 의도와 달리 진위가 왜곡되어 회자되는 일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 해도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과 결과의 딜레마에서 항상 자유로울 순 없지만,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나의 지난 과거에 대해서도 그 당시 내 판단에 책임질 줄 아는 사회구성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일을 다 겪고도 남편의 옆에서 가정을 끝까지 지킨 아내 키티가 가장 대단해 보인다.)



Oppenheimer


ⓒ photo <Oppenheimer>  by Universal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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