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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Sep 06. 2023

<잠> 신혼부부라면 한 번쯤 겪었을지 모를

곱씹게 만드는 일상 미스터리 영화 <잠>

**아래의 내용에 영화의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침대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사야 한다.' 


혼수를 준비하며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이다. 처음에는 이 말의 맥락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했다. 10여 군데 이상의 대형 침대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고 일일이 누워보며, 우리가 원하는 너무 푹신하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대의 좋은 침대를 찾아다녔다. 그 기나긴 여정의 말로는 우리의 기대(정확히는 나의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새 침대와 새로운 수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귓가에 공사장 드릴을 가져다 놓은 듯한 생생하고도 거대한 소리는 가뜩이나 잠에 늦게 드는 나의 두 눈을 더욱 빨갛게 만들었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1) 참고 자야 하나?

2) 깨워야 하나?

3) 내일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영화 <잠>에서 나오는 가장 첫 번째 사운드도 코 고는 소리다. 처음에는 우리만의 특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삭 아내의 숙면을 위해 코골이 방지 양압기를 새로 샀다거나, 아이가 아빠 코골이를 자장가처럼 듣고 있어서 코 고는 소리가 안 들리면 아빠가 없는 줄 알고 운다는 주변 얘기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온 가족이 숙면에 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물론 영화는 극적인 설정을 위해 렘수면 장애로 이상행동을 하는 남편과 그 아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쪽이 잠 못 드는 상황에서 날이 밝기 전까지 남은 밤 시간을 참아내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본 바가 있기에, 갓난아기를 안고 화장실 욕조에 들어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만약 영화 속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하며 봤다.



영화 <잠>

개봉일: 23/09/06

장르: 미스터리, 공포, 오컬트

감독/각본: 유재선

주연: 정유미(수진), 이선균(현수)

내용: 만삭의 임산부이자 식품 대기업 팀장 수진(정유미)과 대사 하나 내뱉기 어려운 단역 배우 현수(이선균)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잉꼬 신혼부부다. 어느 날부터 시작된 남편 현수(이선균)의 '누가 들어왔어'라는 잠꼬대 이후, 그는 밤마다 본인도 기억 못 할 이상행동을 반복한다. 거실에 나무현판으로 걸어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것이 없다'라는 가훈처럼 수진(정유미)은 현수(이선균)가 수면 클리닉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 하지만 약이 맞지 않았는지 도통 효과가 없다. 현수(이선균)가 다른 치료제를 찾아 처방을 바꾸려는 사이, 수진(정유미)은 이 사태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닫힌 결말 VS 열린 결말

영화를 보고 나서 완전히 닫힌 결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각종 기사와 인터뷰를 보니, 열린 결말이란다. 내가 생각하는 열린 결말은 인셉션의 팽이 토템 돌아가는 씬 정도의 헷갈림을 (이마저도 놀란 감독이 나중에 명확한 답변을 해주었지만) 충분히 주고 끝나야 한다고 보는데, 영화 <잠>의 결말 장면만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대로 보여주는 사건의 편집을 좀 더 바꿔서 관객에게 혼란을 주거나(퇴원 장면이 더 마지막에 나온다든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연출이 더 있었다면 충분히 열린 결말이라 느껴질 것 같다.


1-1. 닫힌 결말? 제3장 장모의 반응

닫힌 결말이라 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제3장 수진의 정신의학과 퇴원일에 유독 평면적으로 보였던 장모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딸의 실종 소식에도 별다른 대사 없이 덤덤했던 장모가 거의 실루엣만 비치는 엑스트라 수준으로 나오는데, 과연 이 사람이 제2장 초반에 출산 직후의 딸에게 사위가 저지른 강아지 사건을 언급하며 딸의 안위를 걱정하던 어머니와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어서 딸이 안전하다는 것도 알고, 사위가 집에 돌아가야만 딸이 마지막 미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딸이 걱정되어 부적도 손에 쥐어주고 무당도 데려온 어머니인데 말이다.


1-2. 닫힌 결말? 아랫집 아줌마의 정체

닫힌 결말로 느껴지는 다른 이유는 아랫집 아줌마의 정체와 그동안의 빌드업이다. 영화는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 나온다. 제1장에서는 남편의 본격적인 문제가 시작되고 수면클리닉을 받으며 생긴 이야기, 제2장에서는 남편의 증세가 더 심해지자 병원을 불신하고 무당의 말에 집중하며 히스테릭해지는 아내의 이야기, 제3장에서는 수면장애가 사라진 남편과 그 사이 정신병원에 있었던 아내가 만나며 사건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야기다. 스쳐가는 달갑지 않은 이웃 정도로 비쳤던 아랫집 아줌마의 정체가 제2장에서 아랫집에 살던 할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마치 모든 이야기의 기운이 수진의 합리적인 의심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보인다.


1-3. 열린 결말? 수미상관 사운드와 현실성 부족

열린 결말로 볼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도 생각해 보았다. 도입부와 결말부에 수미상관으로 똑같이 들리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 모든 에피소드가 마무리된 후 갑자기 잠에 든 부부의 모습은 렘수면 장애가 이제 부부에게 동반으로 온 건가 싶기도 하다. 여기에 후반부 상황이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도 한몫한다. 납치된 아랫집 아줌마를 찾아 사람들이 문을 쾅쾅 두드리던 소리가 났는데, 그 뒤로 문을 부수고 사태를 수습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초반에 긍정적이고 러블리하던 아내의 모습은 퇴마에 미친 자처럼 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만만치 않은 기행을 펼치는데, 아랫집 강아지를 보고 자기 강아지를 떠올린 사람이 이처럼 나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드릴을 저렇게 썼을까 갸웃하게 되는 장면이 몇 있었다. (하지만 제2장 말미에서 칼을 들이대는 수진의 모습을 보면 제3장의 초반 장면이 괜히 정신의학과 건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학적 수면장애 VS 빙의, 믿음 VS 의심

영화 <잠>에서 가장 큰 논쟁의 요소는 그래서 결국 남편 현수가 밤마다 했던 무의식적인 행동들의 원인이 렘수면장애 or 빙의 둘 중 무엇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입해 봤을 때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원인을 정확히 제거해서 예후가 좋으면 최고겠지만, 비단 수면장애뿐 아니라 숱하게 많은 이슈들이 부부 사이에 산적해 있을 것이다. 


(과한 해석이기도 하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수면장애는 하나의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러닝타임 내내 수진보다 현수의 논리에 더 공감이 갔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두 사람(부부)이 믿음과 의심의 경계를 어디까지 구분해야 하는가는 결혼생활의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냉장고에 강아지는 믿음으로 극복할 이슈는 아닌 것 같다. 허허)



의외의 웃음 포인트

올해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영화 <잠>의 키워드에 '코미디'가 있었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웃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진이 아랫집 할아버지 이야기마저 거실에 빔 프로젝터 영상을 띄우고 현수 앞에서 PT를 하는 장면은 웃프다. 회사와 집에서 늘 파워포인트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 많았던 회사원의 비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할까. 캐릭터의 사회적 정체성과 꼼꼼한 성격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수진은 그 많은 부적도 혼자 다 붙였으리라.





▼ 영화 <잠>과 관련해 읽어볼 만했던 인터뷰와 기사를 링크로 달아본다. (스포일러 있음)


https://www.dailian.co.kr/news/view/1236744/?sc=Naver

'잠' 유재선 감독 "열린 결말, 해석은 관객의 몫" [칸 리포트]

https://www.mk.co.kr/star/movies/view/2023/08/630604/

‘잠’ 감독 “봉준호 감독, 엔딩 해석 누설하지 말라고”

https://www.news1.kr/articles/5148556

유재선 감독 "'잠', 나와 아내 관계 대입…칸 초청 소식에 둘이 춤 춰" [N인터뷰]②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779

[인터뷰] ‘봉준호 제자’ 유재선 감독의 증명

https://mydaily.co.kr/page/view/2023090509101711030

[‘잠’ ⓶] 봉준호 키드 유재선 감독이 창조해낸 섬뜩한 일상의 공포

https://mydaily.co.kr/page/view/2023090509144000168

[‘잠’ ⓷]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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