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서사 | 요한복음 5:1-1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한복음 5:1)
명절 기간이었다.
예수는 유대 명절 행사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명절은, 예수의 제자들이 보기에 그분을 단기간에 널리 알릴 만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예수의 계획은 달랐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않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5:2-3).
예수는 무리들이 모이는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가로 가셨다. ‘베데스다(Bethesda)’. ‘자비의 집’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각종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풍문에 따르면, 물이 움직일 때 1등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 치유된다는 것이었다.
베데스다는 이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로 가득하였다. ‘베데스다만 가면 다 해결된대! 베데스다만 가면 잘 될 거야.’ 환자들은 베데스다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왔다. 가족들은 처음에 병문안을 매일 오다가,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병자들만 모인 베데스다였지만, 모두의 상태와 사연이 다 달랐기에 그러한 차이를 넘어설 만한 연대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조금만 심기를 건드리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그들의 내면에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절망감,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에 대한 억울함과 우울함,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베데스다의 연못만 바라보며 막연한 희망을 붙들 뿐이었다.
“거기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5).
베데스다 환자 중에도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대표 고인물이 있었다. 당시의 평균수명 만큼이나 투병해온 ‘38호’였다. 그는 베데스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베데스다는 38호에게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매일 지나가는 행인들을 통해 시사 뉴스를 접했고, 무엇보다 ‘자비의 집’이라는 이곳에서 인간 본성의 잔인한 민낯을 목격하게 되었다.
38호가 경험한 베데스다는, 그 이름의 뜻과 정반대되는 곳이었다. 평소에는 친한 척, 서로 공감하는 척하다가 수면에 바람만 스쳐도 병자들의 눈빛은 매섭게 돌변했다. 서로 뿌리치고 짓밟으며 먼저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아무도 남을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도 남을 챙기지 않았다. 아무도 남을 위해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승자 뒤에는 시기하며 좌절하는 다수의 패배자들이 있었다. 베데스다는 ‘각자도생’의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지독한 경쟁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38호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경쟁을 해보았다. 그러나 베데스다라고 해서 모두가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힘없는 병자들이 모인 이곳에는 보다 경증인 환자들도 있었고, 기어코 이들이 항상 물에 먼저 들어갔다. 병이 중한 환자들 중에는, 나름 가진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른 병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가족이나 집안 종에게 대기하다가 물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38호는 앞을 보지 못하거나 이동의 불편함이 있는 장애 환자들이 베데스다에 가득 모여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환자들은 이미 치유를 받았거나, 환멸을 느끼고 다른 길을 찾아 떠났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밤이면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한편 38호는 가진 것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증상도 그 중에서 가장 심각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병으로부터 구원받고자 베데스다를 찾아왔다. 그러나 각자도생의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그에게 구원이란 없었다. 그의 구원을 가로막는 수많은 경쟁자와 방해자만 있을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38호는 자연스럽게 베데스다 환자단체의 회장이 되었지만, 그의 맘속에는 좌절과 절망, 패배감만 가득하였다. 말이 ‘회장’이지 그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자였다. 종종 위트 있는 멘트를 치며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어둡고 상처투성이였다. 어느 시점부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38호의 마음은 어떤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어둡고 차가운 마음 그대로.
명절 기간 불쑥 나타난 예수는 이 가장 절망적인 병자에게 주목하였다. 그리고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의사가 걷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걷고 싶지 않은지 묻는 법은 없다. 그보다 큰 실례는 없으리라. 환자가 병을 앓고 있는데 당연히 낫고 싶지, 대체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인가. 38호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38호를 바라본 예수의 의도는, 그의 상태를 조롱하거나 그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눈빛만 보아도 그만큼은 알 수 있었다. 38년이나 시체처럼 지낸 그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끈 지 오래되었다. 그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주목하셨다. 마치 그 한 사람을 위해 찾아온 것처럼, 베데스다의 모든 병자를 훑어보고는 38호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예수의 불편한 질문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물이 움직이든 말든 꿈쩍도 안 하고 누운 모습에서, 예수는 38호의 맘속에 가득한 상처를 보았다. 한때 기대와 희망으로 뛰었지만 38년 간 어두워지고 차가워진, 냉소적인 내면을 보았다. 사실 그의 영혼은 그의 몸보다 훨씬 더 깊이 병들어 있었다. 38호는 자신의 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여기서도 치유를 받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이면에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았다.
38호의 질병은 물론 큰 고통이었지만, 예수의 관점에서 이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진정한 문제는, 그에게 살아갈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베데스다에 먼저 뛰어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인생의 목적이 없으니 현실이 힘들어지면 그냥 포기하면 끝이었다.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예수는 이렇게 무의미와 허무 가운데 병들어 죽어가는 38호의 영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는 이 질문으로써 그가 아직 나음받아야 하는 상태임을 일깨워준다. 나음을 받아서, 살아갈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38호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해버리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매일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동전 한 푼씩 받으며 누워 지내는 무료한 삶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정체된 마음을 뒤흔든다. 꺼져버린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낫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킨다.
더 나아가, 이 질문은 허무하게 베데스다만 바라보던 병자의 시선을 예수에게로 집중시킨다. 병자는 38년 간 베데스다만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절망뿐이었다. 베데스다에서도 구원을 얻지 못한 38호는 이제 체념한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여전히 구원받아야 하는 상태이며,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은 그 구원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도록 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말은, 그가 예수를 의지하면 예수가 그를 고치고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의미 가득한 예수의 질문에, 38호는 의미를 전혀 포착하지 못한 대답을 내놓는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예수는 그의 병을 치료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 그의 코앞에 서 있음에도, 그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딴 곳을 바라본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베데스다만 바라본다. 낫고 싶다고 하지 않고, 낫지 못한 이유만 설명해댄다. 시스템을 탓하고, 남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문제라고 한다. 결국 다 환경과 조건 때문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원망하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온통 자기연민뿐이다. 38호도 이런 자기의 모습이 싫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5:8).
예수는 38호의 불평과 자기연민을 긍정하지 않았다. ‘물이 움직이면 내가 바로 넣어줄 테니 같이 대기하자’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베데스다 연못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다. 예수는 그의 병든 몸과 영혼을 오직 그 말의 힘으로 치료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호는 예수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의 숫자로 보지 않고 인격적으로 바라보는 예수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과 확신을 느꼈기에, 예수는 그가 진심으로 낫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합리적 의심은 뒷전으로 밀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병자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는 예수의 말을 믿고 순종하고자 힘을 내보았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9).
병자가 예수의 말에 순종하자, 그 말은 그의 삶에 현실이 되었다. 즉시 낫게 된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변화였기에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뿐이었다. 38년 만에 그가 우뚝 서는 이 순간만큼은, 베데스다의 모든 병자들이 한 목소리로 기쁨과 감격의 환호성을 질렀다.
예수는 38년 된 병자에게 시체처럼 살던 과거를 정리하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라고 명한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예수의 지적과 경고 앞에, 38호는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수습할 수 없는 사고를 치고, 이기적인 경쟁 가운데 상처받고 자기연민에 젖어 살던 인생. 겉으로 보이는 친절과 행복의 가면과 달리, 속에 들끓는 불평과 원망, 피해의식과 분노. 끝없는 이기심은 베데스다의 경쟁자들 안에 가득할 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도 가득함을 38호는 알았다. 그래서 그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어디를 가든 결국 또다른 베데스다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 씁쓸한 운명이 그로 하여금 그냥 드러누운 채로 살고 싶게 했다.
인간이 원래 이렇고,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야.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도 승자는 한정된 세상.
38호는 이런 세상에서 자신이 지은 죄가 도대체 뭐 그리 심하다고 이 처지가 되게 하셨는지, 신을 원망한 밤들을 수없이 보내 왔었다. 때로는 그의 잘못을 수긍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결국 자신은 피해자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었다.
이런 그에게 예수는 자신의 죄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죄를 떠나도록 명한다. 순간 38호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더 거슬리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불편함은 잠시뿐, 38호의 마음에 낯선 기운이 돌면서 속이 조금씩 녹아드는 듯했다. 그 근원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장악하여, 이내 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내 앞에 서 계신 이 분이, 나를 단죄하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려 왔다는 생각.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더 나은 삶으로 초청하고 계시다는 생각.
캄캄한 독방에 환한 불빛이 갑자기 켜진 듯, 이 생각의 전환은 38호의 마음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지난 날들의 크고작은 잘못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몸을 망가뜨리게 된 '그 한 가지 죄'가 신 앞에 얼마나 추하고 악한 것인지 깨달아졌다. 부끄러웠고, 비참하였다. 그러나 이 절망은 과거의 절망처럼 그를 마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자신이 당연히 여겨온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싶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마음의 눈으로 그의 앞에 서 계신 분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자, 이 예수야말로 그가 의지할 만한 진정한 '자비의 집'임을 깨닫게 되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찾아온 예수는, 다시 일어나야 할 삶의 의미와 목표를 새롭게 부여해주는 듯했다.
헛되고 거짓된 과거의 희망들을 내려놓고 새롭게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건네는 새로운 삶의 희망임을 38호는 확신케 되었다. 가장 비참하고 힘없던 자를 찾아와 새 삶을 살게 해준 그분을 따르며 본받는 것. 이기주의로 소멸되어 가는 세상을 사랑과 섬김으로 한 조각 한 조각 회복시켜 가시는 신의 뜻을 좇아 사는 것. 비록 아직 이해되지 않는 구석도 많지만, 다시 일어날 이유를 찾은 38호의 발걸음은 굳건해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예수가 앞서 가는 길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