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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ogic Sep 12. 2024

[의료/사회] 의료는 왜 무너지는가

2024년 의료 위기를 생각하며 - 정치적 관료주의, 독재적 리바이어던

어느 인간사회든 저마다의 불평등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정치사회적 체계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한다.
- 토마스 피케티,『자본과 이데올로기』


어느 나라든 완벽한 제도란 없다. 의료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제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보통 그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각 나라별로 사회 구성원들이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를 마음이 있는지- 그 나라의 철학에 맞는 제도를 만들기 마련이다.


반면 합리적 이유가 없는 제도가 유지되는 것은, 보통 비합리적 근거를 고집하는,  제도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거나 제도가 변화될 시 손해를 보게 될 권력자들 때문이다. 그런 나라는 보통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무슨 대가를 치를 것인지에 대한 그 사회 고유의 철학이 없는 경우가 다.




< 우리나라 의료제도 >


우리나라의 현 의료제도는 1977년 건강보험의 최초 도입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DP는 1,055달러로, 중남미의 멕시코(1,315달러)보다 살던 시대였다. 한마디로 '의료보장국가'(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국가가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나라)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하면 된다'는 마인드로 결국 '저수가-저보험료-저보장' 구조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였다. 보험료를 적게 거두되, 의료비의 시장가격을 정부가 원가 미만의 수준으로 매우 낮게 고정시킨 것. 이로 인해 병원이 정상적으 운영될 경우 무려 30~50%의 적자가 발생하는, 기형적인 의료제도를 정착시켰다.


그 이후 1989년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단기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 보장을 실현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DP는 5,817달러로, 12년 사이에 5배 이상 증가하였다. 원가 미만의 의료비는 지속 가능하지 못한 것을 고려하면, 이제 경제력을 갖춘 만큼 마침내 건강보험료와 의료수가를 정상화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수가-저보험료-저보장'의 기형적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024년 대한민국 1인당 GDP는 34,165달러. 세계 경제 강대국이 되었다. 2024년 미국 시사주간지 Newsweek가 선정한 "2024년 세계 최고 병원"에는 국내 18곳이 선정총 132곳이 '우수 병원'으로 분류되었다. 이제는 유럽 의사들과 의대생들도 우리나라 대학병원에 신청을 해서 연수하러 올 정도로 최고 수준의 의료를 값싸고 빠르게 제공하는 세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자랑하게 되었다.




< 무엇이 문제인가 >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그 이면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음 세대 의사가 없다'는 것과, '지금의 의료제도는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 의사가 없어지는 문제는, 우리 시대가 더 이상 유능한 의사를 키워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의학교육은 큰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었다. '환자의 권리와 안전'을 앞세우시대 분위기 때문이다. ? 환자의 권리와 안전을 주장하면 할수록 당장의 환자는 만족하고 병원은 크고작은 오류를 피할  있겠지만, 크고작은 오류를 거치는 과정 없이 유능한 의사로 성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의대생 때부터 다양한 의학적 경험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소 할 수 있었다. 특히 외과 교수들은, 전공의 시절 수술 집도를 100건 이상 직접 할 정도로 방대한 실전 경험과 지식, 실력을 쌓았다. 하지만 오늘날 의대생들은 병원 실습을 돌 때 사실상 구경하는 참관생 신분에 불과하고, 외과계열 전공의들은 물론 전문의인 임상강사마저 대형병원에서는 직접 집도할 기회가 거의 다. (대형병원 외과 전공의는 수련기간 3년 동안 직접 수술 집도를 10건도 안 해본 사람이 많다.)


이 모든 과정을 형식적으로 거치고, 의사 면허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다면? 그 의사는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대학병원이든 일반병원이든 자기 이름으로 환자를 받고 진료하며 환자들의 몸에 칼을 댈 것이다. 의사의 실력은 실전에서 확인될 수밖에 없고, 실전 능력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 향상되는 법이다. 그러나 '환자 안전'의 시대는 점점 실전 경험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물론 환자 안전은 반드시 더 발전하고 철저해져야 한다. 실제로 20년간 많이 좋아졌다. 다만 21세기의 과제는, '이런 시대 맥락에서 어떻게 젊은 의사들을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미래의 교수, 미래의 명의로 키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 점점 더 간접적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도제식 맞춤형 교육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실전 경험이 풍부한 기성세대가 현장을 떠나기 전까지 그 의술은 최대한 전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기성 의사들의 시간투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몸은 하나고 시간이 한정된 현실에, '진료-연구-교육' 중에 '교육'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는 '진료'와 '연구'에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원들이 수익을 거두고 우수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앞선 이 두 가지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제도의 변화와 투자가 필요하고, 21세기의 모든 과학기술과 도구를 활용하여 수많은 시뮬레이션과 연습 등

환자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실전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의학교육이 필요한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의사는 환자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배울 수밖에 없다. 실수할 기회가 있어야 앞으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실수하지 않을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이 의학교육의 필연성이다. 환자들이 이 사실을 어느 정도는 납득해야 의술의 맥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 시대를 역행하는 정부 정책 >


정부의 정책은 이런 시대 추세를 역행하고 있다. 지난 2월,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의대 2,000명 증원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1980년대에 "서울대 의대는 당시 정원 260명, 현재는 135명"이라며 지금 상황이 훨씬 좋으니 증원하더라도 교육의 질 저하는 없을 것이라 하였다. 1980년대의 그 260명은 모두 제약없이 환자를 적극적으로 대면하며 진료 행위를 맘껏 체험해 볼 수 있었고, 현재의 그 135명 중 단 한 명도 40년 전 선배들이 체험하던 것을 경험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온 국민들 앞에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21 세기에서 1980년대처럼 주입식 교육으로 만족하자고 한다면, 환자들, 국민들은 안타깝게도 머리로만 의학을 알고 손으로는 수술할 줄 모르고 현실의 복잡다단한 환자 개개인을 볼 줄 모르는 소위 '돌파리' 의사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빅5' 병원이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책이 진정 우리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일까. 내가 진료 현장에서 만나온 우리나라 환자들은, 건강과 의학에 관심이 아주 많은 지성인들이다. 자기 질병과 관련된 정보를 논문까지 찾아서 외래진료 때 교수에게 묻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수준 높은 토론도 한다. 


과연 기계적인 주입식 교육만 받은 의사들이 이런 국민들의 눈높이에 적절할까. 과연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국민들이 이를 납득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자극적인 뉴스와 캐치프레이즈로 민생에 시달리며 분주한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는 정부가 원하는 정책 추진을 위해 '답이 정해진' 여론조사 결과만 유도한 것인가.




< '바보의사'들의 사직과 건강보험의 미래 >


'10년 뒤 맹장 터지면 수술할 의사가 없다'는 등 미래의 수술대란이 거론되는 시기에, 해방 후 100년도 안 되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국가의 철학을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국가에서, 젊은 의사들은 의료정책의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과 직업 선택을 포함한 자유의 가치를 외치며 정부의 근거 없는 정책에 반대하고 사직하였다. ('파업'이 아니라 '사직'이고, 이미 퇴직을 했기에 국가가 필요하다면 이들의 '복귀'가 아니라 '재취업'과 '재수련'을 설득해야 될 것이다.)


외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소아과 전공의들은 의사들 사이에서 '바보'로 불리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일은 고되고 돈도 안 되는데 최선을 다하여 진료를 해도 문제가 생기면 (과실이 없어도) 수 억을 배상해야 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운 의학지식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미소 지으며 퇴원하는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기에 그 길을 택한 젊은 의사들이다.


설령 10년 뒤 의사 2,000명이 더 나온다고 한들, 우리나라 의사 수가 10만 명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의학교육을 망치기에 차고 넘치는 숫자이지만 의료시장에  영향을 미칠 숫자(2%)는 아니다우리나라 의료의 가격은 정부가 고정시키고 있으며, 오늘의 전공의들은 10년 뒤 교수, 원장이 되어 있을 의사들이므로 도리어 값싼 인력으로 개인적으로는 득을 볼 수 있는 세대라는 점도 반드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사직한 것은 의사 수를 무작정 늘림으로써 이미 몇 년 이내로 고갈 예정인 건강보험재정이 더 가파르게 고갈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인구는 감소하고, 고령화가 초고령화로 심화되는 시대에 무작정 의료 이용량을 늘릴 것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처럼 '돌봄' 체계의 확립- 환자는 어디까지 치료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존엄한가'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상황이다.


건강보험재정이 바닥날 경우, 의사들은 정부가 그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건강보험제도를 토대로 세워진 의료제도는, 건강보험재정이 무너지는 순간 무너지는 것이다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무너진 폐허 위에 의료의 민영화 불가피한 수순이다. 그러면 의사들의 수익은 대폭 늘겠지만, 가족들이 제때 값싸고 효율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의사는 없다.




< 정치적 관료주의 >


그래서 대한민국의 의료는 지금 왜 무너지고 있는가.


국민의 건강과 생명보다, 오직 한 분, '매우 중요한 그분'(Very Important Person)의 정신건강과 정치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적 관료주의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신 있는 관료, 공무원은 국가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소신 있게 국민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지금보다 높은 자리로 이끌어줄 사람에게 충성하거나, 지금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에게 충성하라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점은 모든 국민이 공감할 것이다.




< 독재적 리바이어던 >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MIT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와 시카고대학 제임스 로빈슨 교수의 저서『좁은 회랑(The Narrow Corridor)』은 현 시점에 읽기 매우 시의적절하다.

"자유가 싹트고 번성하려면 국가와 사회가 둘 다 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을 억제하고, 법을 집행하며,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을 추구할 역량을 갖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건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권력과 함께 병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또 있다.

"강력한 국가를 통제하고 제약하려면  강력하고 결집된 사회가 필요하다. [...] 사회가 국가를 경계하지 않으면 헌법과 권리 보장의 값어치는  그것이 적힌 종이값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재국가가 불러오는 공포와 억압 그리고 국가의 부재로 나타나는 폭력과 무법 상태 사이에 자유로 가는 좁은 회랑(narrow corridor to liberty)이 끼어 있다. 바로 이 회랑에서 국가와 사회는 서로 균형을 맞춘다. 균형은 혁명처럼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균형을 맞춘다는 건 국가와 사회가 하루하루 끊임없이 싸워간다는 뜻이다."


『좁은 회랑』은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국가'라는 거대권력이 사회질서와 보호를 위해 필요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국가의 권력이 과대하여 사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때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적 리바이어던'(Despotic Leviathan)이 된다고 주장한다.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국가를 몰락시키는 력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좁은 회랑을 되찾는 길은 무엇인가? 독재적으로 날뛰는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족쇄 리바이어던(Shackled Leviathan)'이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권력의 균형이다.





< 균형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


우리나라 의료는 현재 아무도 못 말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에 의해 그 근간마저 흔들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매우 중요한 그분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야 하는 책임자들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는 듯하다.


의료와 자유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균형을 맞춘다는 건 국가와 사회가 하루하루 끊임없이 싸워간다는 뜻이다."


젊은 의사들과 정부의 대립은 더 이상 '의정 갈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의사 악마화로 심화된 갈등은, 일방적 강행과 회의록 파기 등으로 이제 정부에게로 그 중점이 바뀌었다. 


정부가 그동안 근거없는 정책을 불투명하게 강행해 온 사실은 국회에서 수 차례 밝혀진 바 있다. 그로 인해 수 개월째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그분과 그분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정치적 관료들 외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온 나라가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리바이어던에게 족쇄를 차라고.


지금의 비합리적인 상황과 의료제도, 의료정책을 추진하는 권력의 불평등에 대하여 합당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정부가 끝까지 이를 고수할 경우 피케티의 말대로 정치사회적 체계심각한 위험에 처해질 것이다.


한편 병원에서 환자만 보느라 세상을  모르던 젊은 의사들에게는 올바른 의료가 무엇인지국민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어떻게 하면 올바른 의료제도를 만들 수 있을지, 의사들에게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은 국민들을 위해 타협을 감수해야 될지, 단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며 의사 사회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길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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