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3주, 긴박했던 시간들
※ 2025년 8월에 쓴 글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3주 동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마지막 일주일 전, 중환자실 집중치료를 거부한 이후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주치의는 입원 대기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며 미리 의사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아내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조만간 1인 관찰실로 옮겨 가족과 지인들이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바로 하루 전 오후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적어도 며칠은 더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거센 파도에 떠밀리듯 정신을 가다듬을 틈조차 없이 그 시간을 지나왔던 것 같다. 조금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마무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어떤 마무리를 어떻게 더 잘했을까”라고 물으면 뚜렷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당시 전체 상황에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크게 당황했던 기억은 없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판단력이 흐려진 나를 붙잡아 이끌어 준 것 같았다.
CASE 1 – 예상치 못한 만남의 은총
올해 초부터 딸 가족의 방한은 10월로 계획해 두었다. 연초부터 추진하던 아내의 조혈모세포 이식 시기를 가늠해 보니 4~5월쯤 수술이 이루어지고 나면, 10월이면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 말 아내의 상태가 악화되자, 딸만이라도 먼저 다녀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딸은 온 가족이 함께 오기를 원했지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만류했다. 짧은 면회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온 가족이 움직이는 시간적·경제적 부담, 짧은 면회 이후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한 그들을 돌볼 수 없는 현실, 무엇보다 손주들에게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당시 딸을 부른 이유는 임종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엄마가 아직 정신이 온전할 때 대화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긴박한 상황을 넘기고 상태가 호전되면 그때 온 가족이 함께 다녀가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딸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아내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0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반가움을 표현할 수는 있었지만 대화는 무리였다.
딸은 엄마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내가 왜 온 가족의 방문을 만류했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결국 열흘 동안 엄마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까지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CASE 2 – 마지막 약속을 지켜준 선택
아내는 평소에 빈소를 차리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화장을 해달라고 나에게 당부하곤 했다. 나는 대형병원 장례식장에서는 무빈소 장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대안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내의 절친이 자신의 부친 장례를 무빈소로 치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장례식장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입원해 있던 S병원 장례식장의 카탈로그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더니, 외부에서 돌아가신 경우는 무빈소 장례가 불가 하지만, S 병원에 입원 중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난 경우에는 가능하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굳이 외부의 다른 장례식장을 찾아 나갈 필요가 없었다.
CASE 3 – 기억과 운명의 교차
나는 평소 마음에 드는 사진을 따로 모아 Family Album이라는 폴더에 저장해 둔다. 컴퓨터와 휴대폰 모두 같은 폴더가 있고, 현재 그 안에는 1,900여 장의 사진이 있다.
아내를 병간호하던 어느 날, 문득 영정 사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눈에 들어온 한 장이 있었다. 2020년 1월 26일 설날, 밴쿠버에 살던 딸네 집을 방문해 아내와 나, 그리고 두 손주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아내가 떠난 날, 장례 업체에서 영정 사진을 준비했냐고 묻기에 그 사진을 건네며 아내의 얼굴을 따로 떼어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장례식장에서 완성된 액자를 받아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 마음이 놓였다.
더 놀라운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Family Album 폴더 안에서, 그 영정 사진으로 사용된 사진의 바로 다음 파일이, 아내와 내가 코로나 시기에 처음 Grace Point를 찾아가 찍은 사진이었다. 영정 사진 뒤에 곧바로 유해를 보내준 장소의 사진이 있었다니...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아내의 휴대폰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인데, 아내가 이미 그 사진에서 자기 얼굴만 따로 떼어 독사진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도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이 모든 일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가듯 진행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때로는 그 힘이 나를 붙잡아 흔들리지 않게 해 주었고, 때로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순간들을 대신 이끌어 주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후회도, 감사도 함께 남는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아내와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었고, 딸 또한 그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크나큰 은총이 아닐까.
지금은 남겨진 내가 그 은총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차례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그날까지, 이 모든 순간이 의미 없지 않았음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걸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