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작이 반이다

예순여덟 번째 날 ― 12. 22.

by 바비아나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싶다. 만사가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로 여겨진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이나 보면서 나태하게 천금과 같은 오늘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지는 지금. 여행을 시작한 지 68일째 맞이하는 아침 해는 나를 기운 빠지게 했다.


조식을 먹고 침대에 드러누워 한심한 생각에 빠진 나의 육체에 채찍질하며 기운 내자, 힘내자, 개미 방귀만 한 소리로 다짐을 하고서 어느 블로그에 나온 프라하 산책코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산책코스를 따라간다고 말하면서도 절대로 많이 걷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숙소에서 나와 트램에 몸을 싣고 프라하의 에펠탑이라고 불리는 페트린 타워를 시작으로 프라하의 야경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공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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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의 무엇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광지들을 마주할 때면 도대체 그런 이름을 왜 붙이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프라하의 에펠탑이라는 페트린 타워를 한 번 쳐다보고, 나의 앨범에 있는 에펠탑 사진을 한 번 쳐다보고, 입맛 한 번 쩝 다셔 주고 아무런 미련 없이 뒤돌아서 푸니쿨라를 타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나를 이끄는 강바람과 두 손 마주 잡고 블타바강을 옆구리에 끼고서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강변을 걷든지,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거닐며 울적한 지금의 기분을 뒤로하고 나뭇잎 떨군 앙상한 가지 위로 바람꽃 피어 있는 12월의 여유로운 풍취를 만끽하고 싶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라도 해야지.


다 필요 없다. 나의 몸과 마음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권태로움과 나태함에 찌들어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매우 지겨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 순간 배우 한지민 님이나 손예진 님, 소녀시대 태연 님이 내 앞에 나타나서 같이 산책하자며 나에게 손을 내민다면 나는 인상을 팍 쓰고 흔쾌히 승낙했겠지. 하, 그분들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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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민 님도 손예진 님도 태연 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걷는 것을 포기하고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나 지대가 높아 뻥 뚫려 있는 전망대는 12월의 칼바람이 회오리처럼 불어 닥쳐왔고, 이전과는 다른 구도에서 프라하의 야경을 보고 싶어 했던 나의 올곧은 심지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바람결에 흩날리는 낙엽들과 함께 사라지기에 충분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68일째. ‘여행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좁쌀만 했던 푸념은, 잭이 던진 마법 콩 하나가 순식간에 구름을 뚫을 정도로 자라났던 것처럼 나의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모조리 잠식해 버렸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갔다. 급기야 나의 손가락까지 마음대로 조정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찾게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이곳저곳 이동하며 잠잘 곳을 찾는 것도 지겨워졌고, 제발 한곳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나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왜인지도 모르고, 이유도 없었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노래도 아니었고, 물론 평소 느낌 있게 다가왔던 노래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찌릿한 울림이 나의 귓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까지 울려 퍼지며 깊은 곳에서부터 터질 듯한 무언가가 밀려 나와 코까지 먹먹하게 만드는 이 기분.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결과들로 만족하고 싶었던 오늘이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담담히 흘러가는 오늘에,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내일에 나에게 남아 있던 알량한 자존감마저 바스러져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뭔가 거창한 것을 바랐었나?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도 없는 안타까운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서 그 앞에 가만히 주저앉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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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다. 구름으로 가득 찬 회색빛 하늘 아래로 휘감아 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무거운 바람이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너른 언덕을 찢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롭게 몰아치며 나의 등허리를 가르고 지나간다. 길을 따라 걷다 무심히 바라본 이정표는 어느 곳으로 나를 데려갈까.


순간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제 오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언젠가는 가겠지.’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모두 자리를 잡고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의 친구들. 나는 언제쯤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바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바람을 따라가는 나의 발걸음도 길을 잃지 않는 걸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고양이를 만나 질문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앨리스는 고양이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물었고, 고양이는 어디로 가고 싶냐고 되물었다.


“어딜 가든 상관없어요.”

“그럼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겠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삶을 살아가는 데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할 거라면 나는 좀 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한 이 여행이란 책의 뒷얘기가 어떻게 될지, 이 여행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가 궁금해졌고, 내가 하기로 한 여행,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자고 생각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이제 나의 유럽에서의 일정에 절반은 왔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듯 이제 시작이다.

하아, 이제 시작이라니. 지금껏 매가리 없이 재미없게 넘겨지던 나의 여행은 오늘을 통해서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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