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일곱 번째 날 ― 12. 31.
어제 맺었던 암묵적인 협약은 오늘에까지 순탄하게 이어졌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마을이 있다는 센덴드레로 향했다. 오랜만에 한복을 입고 가려고 했지만, 절대 입지 말라고 소리치는 누나의 목소리에 기가 죽어 한복을 입지는 못했다. 프라하와 빈 그리고 이곳에서까지도 한복을 입지 못했다니. 한국 사람이 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날씨도 춥고, 나 자신도 한복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귀차니즘.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나의 정신은 육체가 지배했기에 나의 귀차니즘을 쳐서 복종시킬 정신력은 나에게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길을 나섰다. 이런 게 인생이기에.
센덴드레로 이동하는 내내 기차는 갈대밭 사이로 놓인 철길을 가로지르며 끝없는 평원을 달리고 또 달렸다. 기차가 만들어 내는 바람에 휩쓸리며 써걱써걱 소리를 내는 갈대밭. 센덴드레로 가는 길은 나의 고향 파란 하늘 아래로 바람 따라 끝없이 출렁이던 갈대밭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죽 이어져 있는 물길 따라 나룻배 한 척 떠다니는 순천만의 모습을 추억하게 했다. 그 모습을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센덴드레에서 마주한 도나우강 줄기는 나직이 피어오른 물안개들로 몽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꿈속을 거닐며 어렴풋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고, 은은하고 흐리멍덩한 주위의 풍경들과 함께 도화지 위로 옅게 흩뿌려진 수채화 빛 풍경들은 나의 눈가와 가슴속으로 촉촉이 스며들어 갔다.
대충 구경을 끝마치고 우리는 올해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러 다시금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카운트다운을 한다는 성당 앞으로 가려고 했으나, 12시가 가까워질수록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우리의 곁을 스치며 강변으로 끊임없이 밀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잠깐 고민을 하다, 밀려드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인파에 스며들어 강가로 향했다.
카운트다운을 언제 시작해야 하나 서로를 마주 보며 머뭇머뭇하던 중,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산발적으로 폭죽이 터졌다. 주변은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란스러운 음성들로 가득 채워졌고, 낯선 냄새를 풍기고 있는 수많은 사람은 나의 정신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불꽃은 하늘 위로 시원하게 펑펑 잘도 터지는데 무언가가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왔다.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시작된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듯 나의 귓가에 도착할 때쯤 속삭여지는 향긋한 너의 목소리.
“Happy new year.”
너의 향긋한 목소리는 나의 귓가가 아닌 나의 입술 위로 살포시 겹쳐지며, 뜨겁고 향기로운 무언가로 나의 입안을 왈칵 채워 갔다. 따뜻하게 나의 혀를 적시고 들어오는 그 뜨거운 무언가는 차가운 강바람에 얼어붙어 있던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녹이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정열의 불꽃으로 멈춰 있던 나의 심장까지 다시금 박동하게 했다. 역시 추울 때는 뱅쇼. 다들 뱅쇼로 행쇼.
불꽃놀이는 어느 한 곳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터뜨리는 불꽃이었고, 도나우강가와 온 부다페스트를 뒤덮을 듯 사방 군데에서 하늘을 밝게 수놓고 있었다. 그 불꽃들은 상상했던 모습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의 자연스러움으로 나의 32살 새해를 밝혀 주었다.
나의 20대의 마무리. 30살의 새해는 나 홀로 백패킹을 하며 아무도 없는 제주도의 한적한 해변에서 맞이했었고, 31살의 새해는 가족들과, 그리고 지금 32살의 새해는 본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부다페스트에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외국인과 함께 맞이했다.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은 처음 살아 보는 것답게 형편없고 수많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지만, 그것들을 다 떠나서 나름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고,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고, 마이너스 통장과 카드빚에 허덕이는 지금의 나는 과연 33살의 새해엔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했고, 2018년 개의 해에 처음으로 고민하기 알맞은 문제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밝아 오는 새해의 첫 태양을 맞이했다.
어찌 됐건 다들 뱅쇼로 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