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아홉 번째 날 ― 12. 13.
스위스에서 만났던 동생들과 베네치아에 관해 대화하던 중 부라노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절대로 부라노섬만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코웃음을 치며 “베네치아까지 갔는데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봐서 뭐 하냐?”라고 말했었다. 허나 베네치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라노섬을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 일찍 거리를 걸었다. 파도는 흘러가는 흰 구름들을 휘감기라도 할 듯 세차게 밀려왔고, 물안개는 바람을 타고 흐르듯 나에게로 떠내려오며 나의 발등을 덮고, 거리를 덮고, 눈앞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어렴풋하게 만들어 갔다. 나름 몽환적인 분위기로 나를 맞아 주는 베네치아의 아침이었지만, 나는 햇빛을 원한다. 피어나 있는 물안개들을 모조리 불사르며 강렬하게 타오르는 햇빛이 있어야 건물과 한복의 색감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이건 뭐. 어찌 됐건 날씨가 추울지도 모르기에 한복 안에 긴 라운드 티와 두루마기까지 단단하게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나는 무라노섬에서 배를 갈아타고 한참을 더 이동한 뒤에야 부라노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상황도 아침과 마찬가지로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햇빛은 비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알록달록 빛이 나야 할 건물들은 살짝 무겁게 가라앉은 색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뭘 어찌할 수는 방법은 없었다.
부라노섬에 있는 건물들이 왜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지에 대해 같이 간 동행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예전부터 부라노섬에 사는 사람들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고기를 잡으러 한번 바다로 나가면 오랜 시간 동안 섬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부들은 자신의 집을 잘 기억하지 못해 한참이나 거리를 헤맸다고 한다. 그래서 한 어부가 자신의 집을 한눈에 기억하기 쉽도록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하던 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져 이제는 하나의 관광지처럼 변하게 된 것이라는 참으로 슬픈 이야기였다.
어쨌든 날씨가 흐려서 건물들의 색감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햇빛이 쨍한 날이었다면 건물들과 한복의 사진이 더 예쁘게 나왔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사진은 역시 후보정이 최고다. 그리고 사진들을 한 군데 모아서 보니 나름 괜찮은 것도 같았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부라노섬 구경을 마치고 다시금 배를 타고 무라노섬으로 와서 약 5분 정도 유리공예품들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밥을 먹고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답답함을 느끼고 밤거리로 나왔다.
해가 지고 난 뒤 어둠은 바다 위로 두껍게 덮여 있고, 밤안개가 끈적거리는 파도와 부딪히며 짙게 엉기어 있다. 한참 동안 길을 걷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이 이르지 못한 골목 사이마다 고여 있는 아쉬움들을 바라본다. 하릴없이 골목들을 맴돌다, 다시금 물가로 걸어 나와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원래 나의 신혼여행지 부동의 1순위는 베네치아였지만, 아마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오는 일은 없겠지. 아직 너와의 인연이 많이 쌓이지 않아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인연이 이어진대도 또 보지 말자. 너무나 아쉬워서 더욱 더 속상한 베네치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