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 번째 날 ― 11. 30.
오늘은 리기산을 가기 위해 일찍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1층 식당으로 가 도시락을 쌌다. 방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주변에는 어둠의 기운들만 가득했고, 로비에 도착했을 때라야 바라볼 수 있었던 창밖의 풍경은 나를 참으로 신나게 만들었다.
스위스는 나의 여행을 시샘하는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음산한 회색 구름으로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신나게 일기예보를 검색하던 나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빗방울 소리.
하아. 아직 배가 출발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 덕에 리기산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역시나 나는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샌드위치라도 먹자는 심정으로 샌드위치를 다 만들고서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문밖으로 나왔다.
눈을 감고 빗물에 흠뻑 적셔져 있는 바람들을 손가락 사이로 넘겨 본다. 나의 귓가에는 빗방울 소리만 쉴 새 없이 들려왔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설레던 가슴도 맑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갔다. 순간 쥐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던 바람이 뜨겁게 뱉어지는 나의 숨결을 움켜쥐고서 저 멀리에 있는 비구름들을 밀어내려는 듯했다.
나는 손바닥을 마주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원을 그려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마 위에는 송골송골 땀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마주치고서 나의 상단전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올려 두고, 스위스에 있는 모든 공기를 모조리 빨아 마셔 버리기라도 할 듯 깊은 호흡을 들이마시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법한 낮은 저음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한껏 달아오른 호흡을 무겁게 토해 냈다.
“저기요 잠시 지나갈게요.”
“아. 쏘리…….”
어쨌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비구름들은 느릿하게 나의 앞에서 멀어져 갔고, 나는 구름 사이로 조금씩 비치는 햇살들을 바라보았다.
“가도 괜찮겠지?”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도시락을 가방 깊숙이 챙기고서 숙소를 나섰다. ‘괜찮겠지?’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순간부터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뻔한 흐름 구조상 시작되는 시련. 나는 당연히 그 시련을 예상하지 못한 채 버스를 타고 가며 호숫가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물빛들을 즐기고 있었다.
나를 태운 버스는 어느덧 선착장에 도착했다. 리기산을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호수를 넘고 산악열차를 타고 산을 건너 한참이나 이동을 해야 하는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언제 또 스위스 호수 위를 배를 타고 건너볼 수 있겠니? 라며 한참 들뜬 발놀림으로 서둘러 배에 올랐다.
배는 서서히 호수 위를 미끄러지고, 나는 신이 나서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칠렐레팔렐레 배 안을 방황하다 배 뒷머리에서 펄럭이는 스위스 국기를 발견했다. 처음에 한복을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방문하는 나라들의 국기 앞에서 필수적으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아직 남의 나라 국기 앞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노여움이 퍽 치민다. 지금부터는 꼭 사진을 찍어야지, 라고 펄럭이는 국기를 보며 다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처음보다 더욱 진한 회색빛 구름들로 차올랐지만,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게 어디냐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 모든 공간들은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정결함을 중요시하며, 어두움이란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해맑은 청순함만 가득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싱그러운 기운들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나는 이처럼 사랑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스위스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곳의 모든 풍경은 평안함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덕분에 지금껏 상처투성이였던 나의 마음도 스위스의 청량한 풍경들로 치유되어 가는 듯했다.
유람선은 어느덧 선착장에 도착했고, 나는 산악열차로 옮겨 탔다. 우리가 탄 열차가 산을 오르면서 조금씩 지대가 높아질수록 하늘은 더욱 더 많은 구름으로 켜켜이 채워지기 시작하더니 아침의 시원했던 빗방울들은 조금씩 서로 뭉쳐지며 조막만 한 눈송이들로 변해 갔다. 시간이 흐르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굵어지는 눈발들은 나의 눈에 보이는 스위스의 모습들을 더욱 스위스답게 다듬어 가고 있었다.
등산 관련된 영화들을 보면 눈보라 치는 산을 등반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타이밍에는 꼭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나는 이날 진정으로 몸소 체험하며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서 보이는 장면들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내센터에 들러 휴식을 취하던 중 리기산 정상까지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을 듣고, 뭐 별일이야 있겠냐 싶어 눈보라를 헤치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미친 듯이 퍼부어 대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굳은 각오로 호기롭게 눈발을 해치며 나아갔지만, 얼마나 올랐을까. 알게 모르게 나의 허벅지 감각은 무뎌져만 갔고, 나의 움직임은 점차 더뎌지기 시작했다. 다리를 들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신발은 바닥에 들러붙어 버린 듯 떨어지지 않았고, 힘을 주어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 완전히 빙판으로 변해 버린 언덕에서 나의 발은 미끄러지며 비탈길 너머로 굴러떨어졌다.
진정으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오가며 내가 왜 여기를 올라왔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허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파리에서부터 시작된 ‘의지의 한국인답게’라는 이 말 덕분에 나는 그 누구도 올라가지 않는 정상으로 향했고, 무식하게도 그 객기 덕분에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리기산의 정상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나의 온몸을 찢어발길 듯이 불어오는 눈보라 폭풍과 주제 파악 못 하고 객기를 부리다 죽어 가는 나만이 존재했다. 아무튼 굳어 가는 나의 몸을 겨우 이끌고서 정상에서 인증사진까지 찍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한 상태로 겨우 안내센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눈들로 범벅이 되어 눈사람처럼 변해 버린 나의 모습. 그리고 청바지 하나 달랑 입고 있던 나의 허벅지는 동상이라도 걸렸는지 아무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이런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해 보였는지, 안타까움에 어찌할 줄 모르고 킥킥거리며 웃고 있던 너. 내가 다 봤다.
어찌 됐건 많은 사람의 관심 어린 따뜻한 시선은 얼어붙은 나의 몸을 조금씩 녹여 주고 있었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안내센터 구석에 쭈그리고 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는 이제 막 기차에서 내린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줄줄이 손에 손을 잡고 비명을 지르며 산 정상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하아. 바이. 짜이찌엔…….
기차를 타고 정상에서 내려오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잦아드는 눈발과 맑아지는 시야에 나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악마가 기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곳에 살아도 인간은 본성이 ‘나쁜 놈’이란 걸.
집으로 돌아갈 때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기 위해 중간 정착지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호텔도 같이 있었는데, 나는 언제쯤 여자친구와 이런 곳에 머물면서 휴식을 즐길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풍경에 심취해 있을 그때 하늘이 열리고 쏟아지는 빛줄기가 저 멀리에 보이는 이름 모를 산을 비추기 시작했다.
빛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변해 산으로 쏟아져 내렸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내려는 듯 구름 사이로 아찔하게 밀려 내렸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돌판에 글씨가 새겨졌다고 하던데, 실제로 하늘이 열린다면 저런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 내 눈앞으로 펼쳐졌다. 그 풍경은 리기산 정상에서 얼어 죽을 뻔했던 고생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그 순간은 이제 막 어둠의 날갯짓을 하며 세상을 파멸로 이끌 뻔했던 내 안의 악마를 다시금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들었고, 순백의 천사가 서서히 기지개를 피며 악마에게서 밀려나 있던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는 듯했다.
아, 바로 그 찰나. 발아래 쪽에서 불쾌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나의 육감 레이더에 스치듯 걸려들었다. 호텔에서 스파를 즐기며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이 환상적이고 판타스틱한 광경을 보고 있는 한 서양인 커플. 서로를 꼬옥 껴안고서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사랑의 맹세라도 하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웃으며 행복에 젖어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발밑에 켜켜이 쌓여 있던 눈들을 조금씩 모아 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무거운 말들을 낮게 읊조렸고, 커다랗게 눈들을 뭉쳐 갔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분명히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성악설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