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째즈시

서른여섯 번째 날 ― 11. 20.

by 바비아나


오늘 저녁에는 째즈시에서 재즈 공연이 있는 날이다. 예전부터 재즈를 좋아했지만 한국에서는, 아니 순천에서는 좀처럼 재즈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콘서트장도 아직까진 가 본 적이 없다. 20대 중반 싸이와 김장훈의 완타치 공연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다. 잠깐. 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눈물 좀 닦고…….


아무튼, 재즈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은 어려운 음악?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내 주변 친구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형의 자산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미술관 구경하는 것도 무지 좋아하지만, 나는 고전미술보다는 현대미술을 더 좋아한다.


어쨌든 나는 무형의 자산에 투자할 줄 알고, 그 가치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왜 가난할까? 대신 마음이 부자일까? 근데 항상 생각해 봐도 나는 마음이 부자 같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총체적 난국인 듯.


아무튼 스페인의 재즈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내심 기대를 엄청 많이 하고 길을 나섰다. 공연장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매일 한 발짝씩 발을 뗄 때마다 무거운 워커를 질질 끌다시피 거리를 흐느적거리던 나의 다리였지만, 오늘따라 깃털보다는 무겁지만 사뿐사뿐한 발걸음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다. 잠시 후. 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마법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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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갛게 퍼져 있는 노을과 우아함을 뽐내는 푸른빛 하늘이 오묘하게 어우러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은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고 나를 마법의 세계로 인도한다.


보라색은 빨간색의 힘과 파란색의 우아함을 합쳐 놓은 색으로서, 예전부터 고귀한 색이라고 불려 왔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미적 센스가 뛰어난 사람이 많고, 정열의 빨강과 고독의 파랑으로 만들어진 탓에 정서불안, 질투나 우울 등 복잡한 심리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지만, 나는 보라색이 좋다.


하늘을 잠식해 가고 있는 보랏빛 푸르름에 알록달록 갖가지 색깔들로 어지럽혀져 있던 나의 마음은 한순간에 모든 색깔을 잃고 하늘과 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보라색 물결 한가운데 초연히 떠 있는 손톱 달은 순백색 몽환의 숲으로 나를 인도하는 이정표라도 되는 듯 나를 이끌었고, 그대 손 맞잡고 달빛 속으로 한발 성큼 다가서자, 보랏빛 향기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나의 눈 안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마법에 취한 듯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 오늘따라 그대 생각에 설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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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를 걷는 것 같던 나의 발걸음은 어느덧 째즈시에 멈춰 섰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나의 가슴을 진정시키며, 음악에 빠져들기 딱 좋을 정도로 알딸딸해질 때쯤 나를 또 다른 마법의 세계로 인도해 줄 바르셀로나의 재즈 연주가 시작되었다.



재즈의 선율에 플라멩코 특유의 음악적 감성과 한이 서린 듯한 보컬의 음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날치알 오징어 물회 같은 느낌으로 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지금의 기분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재즈의 선율과 음표들이 눈앞으로 튀어나와 나의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일 때쯤. 그것들은 서로 부대끼며 눈 깜짝할 순간에 어마무시하게 큰 망치로 변했고, 그 망치는 나의 고막을 타고 들어가 두더지 잡기를 하듯 중추신경 속에서 춤추고 있는 뉴런 세포들을 하나하나씩 후드려 패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을 선물해 주었다.


이 노래는 진정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음정과 박자 하나하나가 ‘내 주먹은 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 공간과 공간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 가령 시간이나 공기 같은 것들까지도 모조리 깨부수며 보편적인 인식의 공간 너머까지도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진정한 바르셀로나만의 갬성을 가지고 있는 이곳의 재즈. 지금껏 보지 못했던 스페인의 새로운 정취를 나의 귀와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한 기분. 이곳에 함께 온 동행도 공연하는 뮤지션들이 연주한 노래 제목을 궁금해하며 여기저기 검색을 했었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자작곡일까? 하는 생각에 모든 연주가 끝마쳐진 뒤, 앨범을 구입하거나 노래 제목을 물어 보려 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줄 아는 쫄보라서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음악에 넋이 나가고 혼까지 빠져 있던 터라 녹음을 할 정신조차 없었다. 그나마 이 한 부분만이라도 촬영할 수 있었다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오늘 하루는 마법으로 시작해 마법으로 끝이 났다. 역시나 오늘은 행운이 넘치는 굉장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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