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날 ― 11. 11.
오늘은 론다를 떠나 그라나다로 이동하는 날이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늦잠을 잤다. 원래도 늦잠을 자지만, 오후 늦게 출발하는 기차시간 덕분에 더욱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짐 정리를 차분히 마친 다음 배낭을 메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차 출발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의 여유가 있었다. 요깃거리라도 찾아보기 위해 역 근처를 흐느적거리기로 했다.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문을 연 식당은 많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커피숍을 발견한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단것을 그리 즐겨 먹지 않았다. 특히 사탕은 전혀 먹지 않았던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후 주위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 저렇게 맛없는 것을 왜 먹나, 라고 생각하며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요즘에는 바람 커피로드 이담 형님과 나의 최애 장소 라라무리의 주인장 셔리킴과 수비 누나 덕분에 핸드드립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 순천에서 맛있는 커피만을 찾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렸었지만, 나의 입맛을 충족시켜 주는 곳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어떤 날 오후, 불현듯 이담 형님이 말씀하지 않았나? 싶은 이야기가 나의 머릿속에 스치듯 떠올랐다.
“커피는 다 맛있다. 세상에 맛없는 커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어떠한 성향을 지니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커피의 맛이 달라질 뿐이다.”
아무튼 요즘도 커피숍에 가면 항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맛있는 커피 주세요.”
기차를 타고 가다 버스로 옮겨 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스페인의 지붕이라 불리고, 스페인어로 ‘눈 덮인 산맥’이라는 그라나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의 도착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며 저건 과연 만년설일까? 라는 궁금증이 해결되기도 전에 나를 태운 버스는 그라나다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2박 3일 동안 그라나다에서 머물게 된 나의 숙소는 이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호스텔이기는 했으나, 건물 전체가 재즈 바로 운영되는 덕분에 방문자들의 후기들에 호불호가 많이 갈려 있었다. 공통적인 불호는 너무 시끄럽다. 뭐 얼마나 시끄럽겠냐 싶어 예약을 했고, 숙소에 도착한 후 짐을 풀고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나는, 문 너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흥겨운 재즈 음악 덕분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통제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라나다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첫 번째 이유. 그것은 타파스 투어이다.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술을 시키면 안주가 공짜로 나오는 그라나다. 사람들을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술집에 머무르게 하고, 더욱 더 많은 술을 시켜 먹을 수 있게, 술을 시킬 때마다 더 맛있는 안주가 나온다는 이곳 특유의 문화 덕분인지 그라나다는 애주가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잠깐의 휴식 같지 않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 론다에서부터 그라나다로 같이 넘어온 동생과 그 동생의 친구와 함께, 술이 아닌 타파스를 조지러 거리로 나왔다. 나오기 전, 호스텔 직원에게 추천을 받은 식당은 이미 가득 찬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은 테이블 곁에 서서 타파스와 술을 즐기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식당들을 찾으러 다니다, 최대한 한국 사람들이 없는, 현지인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공통된 의견에 한참을 더 기웃거렸고, 들어가게 된 식당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라나다의 분위기를 즐겼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 주제는 직장과 취업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어차피 그런 골치 아픈 고민은 한국에 돌아가면 평생 하게 될 걱정이고 생각들인데, 왜 여행까지 와서 그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앞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말했다.
1. 낯선 이의 이름과 나이보다는 뭘 하면서 재밌게 보내는지, 앞으론 무슨 재밌는 일을 할지가 궁금해졌고, 다른 삶을 통해 위안과 새로움을 동시에 공유한다.
2. 나이, 직업, 배경에 대한 선입견 없이 현재와 미래에 온전히 충실한 대화로 사람을 얻어 간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한 가지가 호구조사이다. 다른 질문은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나이만이라도 물어 본 다음부터 시작되는 한국식 인간관계. 한국은 나이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최근에 영어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반말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반 존대라는 의견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서로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기본적으로 존칭을 쓴다는 것이었고, 이것을 바꿔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나이의 높고 낮음을 떠나 서로가 서로에게 존대한다면 나이만큼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서양 문화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나이를 알고 나면 때론 상대방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무시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살아온 삶이 무시당할 이유는 전혀 없고, 그들의 삶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나이 먹은 사람들보다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어찌 됐건, 나 나름대로 쓸 데 있는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며 흘려보내는 그라나다에서의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