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런던에서의 자전거는 낭만이 아닌 생존이다

다섯 번째 날 ― 10. 20.

by 바비아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첫날의 자전거 렌트 실패를 뒤로하고 현지인과 같은 포스를 풍기며 자전거 거치대에서 잠들어 있는 자전거들을 곁눈질로 한번 주욱 둘러본 뒤 16번 자전거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많은 이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와 현지인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였다고 스스로 칭찬하며,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도로 위를 달렸다.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폭주 기관차와 같은 픽시 한 대. 나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블랙캡.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미친 듯이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


여긴 어딜까, 나는 누굴까, 나는 왜 자전거를 타고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렇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걸까 등등의 생각을 하며 나 또한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갔다. 내가 생각했던 런던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이미 상자를 열어 버린 판도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런던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낭만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개뿔. 모든 이들은 오직 앞만 바라보며 자신과의 레이스를 뛰고 있었다. 그들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끊임없이 도로 위를 질주하고 또 질주했다. 이 도로 위에서 나란 존재가 콜레스테롤 찌꺼기처럼 느껴졌다. 우심방 좌심실에서부터 맥동하며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피의 흐름을 방해하고 혈관 속에 진득하게 자리 잡은 콜레스테롤 찌꺼기. 나의 존재가 이들을 고혈압 환자로 만드는 건 아닐까? 그래도 그 정도 민폐는 아니리라 자위하며, 낭만 따위는 개뿔도 없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또 밟아 갔다.


스치듯 지나간 빅벤은 공사 중. 런던아이는 꾸물꾸물 밀려드는 인파 덕분에 멀리서만. 버킹엄궁전 교대식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맘 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날의 자전거는 나에게 애물단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계륵과 같은 존재. 나는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 코번트 가든을 향해 끊임없이 페달을 밟았다.


나의 오해인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화창한 햇빛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우중충한 날씨 덕에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런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오늘만큼은 화창한 푸르름이 녹아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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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지는 푸르른 빛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과 부딪히며 잘게 부수어져 견고해 보이는 건물 틈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빛살들은 건물에 묻어 있던 역사의 숨결들과 어우러져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던 시간들을 녹이고, 시간의 조각들을 거리 위로 차곡차곡 흘려보낸다.


떨어진 조각들은 거리를 걷고 있는 많은 사람의 발걸음에 치이고 밟혀 모래알보다 더욱 더 곱게 빻아지고, 자그마한 산들바람에도 피어나는 꽃가루처럼 향긋한 세월의 향기를 사방으로 풍겨 낸다. 나는 거리를 걷다 멈춰 서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있는 힘껏 가슴을 부풀려 이곳의 향기를 마음속에 담아 보았다.



한동안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노래가 멈춘 찰나의 순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청중들의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잔잔하게 떨려오는 나의 심장은 아드레날린을 조금씩 뿜어내며 나의 온몸에 짜릿한 흥분감을 허락했고, 한껏 고조되고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들의 관심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관종처럼 중심부를 향해 사뿐사뿐, 한 발짝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디뎠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더욱 천천히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채와 갓을 꺼내 들었다. 이국적인 가방에서 꺼내지는 나의 장비에 사람들의 함성은 더욱 커져만 갔고, 그에 발맞추어 더욱 크게 맥동하는 관중들의 심장박동 소리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나의 고막을 강하게 두드리고 살갗 위로 오싹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곳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아우르며 부채를 강하게 펼쳐 들고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려는 한을 토해 내는 척하며, 바구니에 1유로짜리 동전 하나를 던져 주고서 유유히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와 한복을 벗고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나서 야경투어를 위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제는 튜브를 타고 이동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졌지만, 내일이면 프랑스로 이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마디. 박수칠 때 떠나라. 손을 들고 짝 소리 나게 박수 한 번 치고서 계속 길을 걸었다.


약 2시간 정도 진행된 아경 투어를 간신히 끝마쳤다. 빡빡하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자세한 설명들과 함께 여러 가지 팁들을 얻을 수도 있다는 장단점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기분. 투어를 신청하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한편 드는 생각으로 아무런 일정을 준비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첫날에만 도시 투어를 신청하고서 가이드분께 일정과 여러 정보에 대한 의견을 물어 봐도 충분히 여행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잘 있어라. 런던의 불빛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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