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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Mar 27. 2022

내 얼굴의 색

한국에서 거울을 보면 난 그냥 한 인간을 본다. 특별한 인종을 생각하지도 않으며, 특별한 성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그냥 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외생활을 오래 할 때면 나는 언제나 인종적 정체성을 느꼈다. 나는 항상 "아시안"이었다. 그 인종적 정체성을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시안이 의외로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것이었으며, 내가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내가 수많은 공부를 잘하는 nerd 아시안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배웠으며,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고도 자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경험했고, 반드시 빠른 것이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자유로웠다. 내가 일 평생 맞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던 그 전답들이 인생의 유일한 해가 아닌 수많은 정답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인생의 훨씬 더 높은 자유도를 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더 열심히 글쓰기에 전념하고 책을 쓸 수 도 있었던 것 같다.  


해외에서 14개월을 지내면서 결국 유학을 결심했고, 지금도 해외에 유학을 나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준비 중이다. 


그런 한편, 외국에 있을 때 마음이 온전히 편하지 않았다.  항상 내가 minor, 비주류라는 것을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길을 걷다 누군가 내 길을 가로막고 "칭챙총"을 외쳤을 때,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니 친구라는 놈이 내 앞에서 신나게 "칭칭챙챙총총"소리를 내며 춤을 출 때, 내 돈 내산으로 소주를 친구들에게 주고 "아시아인들은 쌀로 만든 술을 마셔서 눈이 작은 가봐" 따위의  소리를 들어야만 했을 때 그러했다. 


한국의 유교사상이 다른 문화가 아닌 아직 서구화되지 않은 "느린" 문화로 여겨질 때도 그러했으며,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을 모두 무시하고,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만 주는 포악한 시스템으로 묘사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 더욱 서럽곤 했던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사소하게 여겨질 때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마치 내가 아주 불운하게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하필 재수 없게 경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이너 플링스>의 저자 캐시 박 홍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느꼈던 그 온전히 편하지 않던 감정들이 바로 "minor feelings"이며 절대로 그 감정들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한국인 이민 2세대로 태어난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사소한 감정들을 모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라며 핀잔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내민다. 


이건 "우리(비백인)"가 예민한 게 절대 아니야라고 강력하게 외치면서 말이다. 

그가 이곳 (미국)에서 살게 된 것은 사실 당신(미국인)이 내 조상의 나라(한국)를 둘로 쪼개 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슬프게도 한국이 분단된 것에 미국의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대부분의 한국인조차 이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그 슬픔은 더욱 증폭된다. 우리는 어쩌면 저들이 종이접기 하듯 쉽게 나누어 생겨버린 분단선의 무게보다 그 이후에 꼬깃꼬깃 주머니에서 꺼내 우리에게 던져준 사탕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구 상의 가련한 자들은 모두 이 사탕을 안다. 총격적인 끝나면 허쉬 초콜릿을 나눠주고 급습 전에 엠엔엠즈 초콜릿을 배포했다. 미군이 전투 헬기에서 덤덤 롤리팝스를 뿌리면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팔을 쳐들고 헬기를 쫓아갔다. (...) 폭탄이 터져 파인 땅에 사탕을 심으면 그 사탕껍질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자라난다."  -246P, <마이너 필링스>


그 종이접기 같이 간단했던 분단선이 그어진지 2세대가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나 역시도 어쩌면 서구권에서 던져준, 혹은 앞으로 던져줄 사탕을 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며, 더 넓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며 그곳을 막연하게 쫓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그 무언가도 그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유학 준비를 그만둔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꼈던 이 감정들과 이 감정들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그리고 이 감정들은 아직도 분명히 우리의 삶 속에 명징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항상 상기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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