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자유주의

『노예의 길(The Road of selfdom)』을 읽으며

by 도쿄 소시민

자유는 수단일까 아니면 목적일까? 책에 따르면 답은 간단하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인 것이다. 저자는 자유의 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의 대립항으로서의 개인주의적 성질을 지닌 것이다. ‘자유의 적’은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적 성질을 지닌 사상들이다. 그는 2차 대전 막바지의 시대상을 고찰하는 것에서 책을 시작한다. 2차 대전의 원인은 히틀러, 나치로 표상되는 거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악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프러시아주의’로 드러나는 독일의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성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 후에 그는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성향을 띠는 것에 문제의식을 던져놓는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그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성질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사상들이었다.

당시 진보주의자들은 유토피아적 사회를 설정해놓고 그 곳으로 나아가는 길을 계획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저술에 따르면 이러한 계획은 실행 불가능할뿐더러 그저 독재로의 귀결을 낳게 된다. 어떤 계획이든지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압제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정부계획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주장한다. 명문화된 법은 개인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활동 반경을 명확히 하여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틀에서 그는 정치적, 법적, 경제적, 사상적 측면에서의 압제(계획)와 자유에 대해 기술한다. 2차 대전 이후 사회 전반에 만연한 전체주의적 풍조를 배격하고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다. 20세기의 현대사를 되돌아봤을 때 그의 이러한 지적은 유효한 것이었다. 구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은 입으로는 유토피아를 말하다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빠져 몰락했으며 다른 사회주의를 주창한 국가들 역시 그 내부의 전체주의적 성질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유효하기만 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의 자유 사랑은 매우 일관되어 한 편으로는 순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인간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한 ‘자유’를 극단까지 보장한 신자유주의의 결과물 역시 비인간적이었던 것은 지독한 패러독스다. 개인의 자유를 극단까지 보장했을 때 가장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정말 창의적인 방법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힘 센 자들과 가진 것을 빼앗길 자유만 남은 나머지 사람들의 이분화라는 비극만 낳았을 뿐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저작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몇 가지 질문이 있을 것 같다. 먼저 글 서두에 필자가 던진 “자유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는가?”가 첫 번째 질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유는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행복이 자유의 필요조건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과연 자유가 없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덧붙여 이 질문에서 파생 된 곁가지 질문도 같이 던져보고 싶다. ‘자유’가 그 자체로 목적이라면,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잠깐 동안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하이에크가 비난한 것처럼)그렇게나 비난받을 만한 일일까?

그는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는데, 결국 그의 ‘신자유주의’란 정부의 시장경제에 대한 일체의 통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임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의 양극화로 귀결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는 이러한 양극화(특히 부의 세습)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생각엔 부를 세습하는 것이나 좋은 머리, 좋은 유전자를 세습하는 것은 모두 그 원리가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의 세습에 대해서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해 그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는 가족제도가 존재하는 한 적어도 자유주의 사회 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대물림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했듯이 특정 권리의 보장은 다른 권리의 비(非)보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상속제도는 돈 있는 자의 특정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질문은 운의 문제이다. 하이에크는 책에서 경쟁이 ‘맹인적’이기 때문에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닌, 그야말로 카오스에서 만인이 능력과 운에 따라 경쟁하면서 나타난 카탈락시 그 자체가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롤스의 관점에 따르면 ‘운’이란 결국 아무도 자격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 누구도 그러한 운(혹은 능력)을 가질 자격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운’을 중립화시켜서 재분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와 롤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러한 ‘운’을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명의 거장 사이에서 우리는 운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립해야할까?


P.S 이렇게 자유 빠돌이였던 하이에크는 말년에 맛이 좀 갔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특히 칠레의 독재자인 피노체트를 옹호했던 것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 ‘다수의 압제’에 대한 그의 혐오가 ‘일인의 압제’를 옹호하는 해괴한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1. 독후감
또다른 파시즘

현우: 궁금했던 점이 원진이가 어떻게 반박할지. 열심히 반박해온걸 보니까 기대됨.

이해 잘 되게 쓴 것 같아. 우리가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 사실 (나는)자유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에 대해 정의하고, 사회주의 목적엔 동의하면서 수단엔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목표를 잘 모르고 지지하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 내가 그랬던 것 같아.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잘 모르니까. 하이에크가 말한 대로 사회주의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생각이 좀 멀어진 것 같아. 하이에크가 생각만큼 또라이는 아니더라. 그렇다고 해도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단점을 (그가) 완벽히 보완한 것 같진 않은데. 대안도 파시즘에서 벗어난 것 같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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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 결국 또 다른 파시즘에 불과한 것 같아. 시장 파시즘. 또 다른 지배와 종속이야. 사실 책을 읽으면서 맨 앞에 아까 현우가 설명한 부분이 전제가 되는 부분인데. 사회주의는 뭐고 자유주의는 뭐고 자유는 뭐고. 동의를 잘 못했다 여기서. 이 책이 일관성은 있는데(시장경제를 끝까지 옹호하는데), 그 지점은 좀 그래. 열한 군데 지점에서 반박할 부분을 찾았어.(ㅋㅋ) 전제 부분에서 이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이 사람의 자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자유란 결국 외부에 종속되는 자유에 불과해.

옛날부터 로크나 몽테스키외부터 자유는 비지배 자유를 전제로 했거든. 비지배는 시민적인 자유, 로마에서 내려오는 이상적인 자유인데, 하이에크의 자유는 단순히 간섭배제의 자유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이것은 진짜 자유주의 이상에서부터 멀어진 변형된 자유주의 같아서 그 부분이 별로였어. 나머지 부분은 (나름)통찰력이 있었다. 특히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관련되어서는. 마지막으로 안 좋았던 부분은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이 너무 기술적인 것 같아. 에리히 프롬은 분석적이었다면, 이 사람은 그저 기술적 언급만 하지 왜 그 사람들이 동조를 하고 어떻게 동원되며, 아니면 어떻게 무너지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 부분이 이 사람의 한계가 아닐까?


상일: 책을 부정적으로 읽었다는 것이지?


원진: 음 긍정적인 부분도 많고 (ㅋㅋ)


상일: 이 사람의 다른 저작을 읽었는데, 살면서 읽었던 책 중에 제일 내 원래 관점에서 먼 책이었어. 그런데 말이 되더라. 많이 흡수했어. 특징적으로, 44년에 쓰인 책. 초기저작에 속한다. 학문적인 성과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젊은 글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 왜냐면 이 사람 후기 저작 같은 경우에는 정말 테크니컬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또 그것만 다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접근도가 떨어지더라. 스스로의 아집에 갇히는 경우도 많았고. 이 책 자체는 괜찮은 부분이었어. 민주주의가 다수의 압제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진성자유주의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 생각의 전환을 갖다 준 책이라고 해야 하나...


2. 「노예의 길」 내용 개괄

상일: 책 내용을 요약하자면, 결국 사회주의 비판이야. 사회주의만 주구장창 까고 있어. 약간 유의해야할 부분이 있는데, 이 사람은 허수아비를 치고 있다는 비판을 정말 많이 들었어. 쉽게 말해서, 본인이 만든 사회주의를 까고 있다는 것이지. 실제 사회주의자들은 그렇게 안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시대사적으로 히틀러의 패악질을 보고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찾아낸 것인데. 그래서 깐 것이고. 그 논리 전개가 엄청 정교하지는 않아. 집단주의 체제. 계획경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3. 「노예의 길」 비판
논리적 모순들

원진: 이 사람의 주장은 결국에 사회주의=전체주의라는 거야. 전체주의 사상은, 독일의 나치즘이나 파시즘은 결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왔다는 것이고. 이게 메인 테제야. 이 사회주의와 나치즘의 지향 가치가 같고 독일 사회주의 사상을 나치즘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같고 둘 다 비판해야한다는 논리였어. 그런데 한 사상이 어떤 사상에 영향을 주거나 사상이 같으려면 지향 가치도 같아야하고 수단도 같아야하고 연원도 비슷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점에서 하이에크의 주장은 오류가 있는 것 같아.

먼저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가 비슷한 느낌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시장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지. 둘 다. 그래서 둘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 자본주의 시장 체제를 어떻게 바꾸자. 다만 개혁 방법에 있어서 수단이나 가치는 다르지만 그 지점은 비슷한 연원을 갖는 것이고. 하이에크같은 후기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엔 사회주의나 나치즘이나 둘 다 자유주의를 때리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 사실 자유주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시장을 때릴 뿐인데.

이 사람이 중간 파트에서 얘기하는 것이 독일에서 사회주의가 나치즘으로 연결되고 사회주의의 수단들이 나치즘으로 옮겨갔다고 얘기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이 젊은이들이 과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을 때 그 사회주의 운동을 제대로 인식했는가도 중요한 것 같아. 패전하고 나서 독일의 경제 상황이 혼란스러웠잖아. 그 상황 속에서도 지주들이나 부르주아 계급들은 어느 정도 특권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자연스레 시장이나 자본주의에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의 진지한 고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기보단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상황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을 뿐이고. 그들은 당연히 나치즘에도 경도될 수 있는 것이야. 사회주의가 나치즘으로 연결됐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나 나치즘이나 반 자유주의 운동의 쟁점은 잡다했어. 폴라니가 쓴 글을 보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정말 많은 사상 영역에서 이뤄졌어. 그걸 다 싸잡아서 말할 수는 없는 거지. 왕당파도 있고 제국주의도 있었고 카톨릭이나 개신교 종교 근본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다 전체주의로 몰아갈 수는 없어. 전체주의는 특정적인 특징만이 있는 것이니까. 결국엔 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 계몽주의의 산물이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모순도 있어. 하이에크도 언급했듯이 처음엔 자기 조정적 시장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다가 시장도 법이나 틀이 있어야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모순되는 서술이잖아.

또, 자유주의가 현대 문명의 개인주의의 기초라고 할 때 자유주의의 가치라는 것은 사회주의의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아.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공부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ㅋㅋ) 자유라는 의미의 변화를 얘기하는데, 강제로부터의 자유는 비간섭 자유가 있고 비지배자유는 자의적인 권력에 종속되지 않을 자유. 나보다 권력을 가진 것에 종속되지 않을 자유.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비지배자유를 추구하다가 비간섭 자유주의로 나갔어. 자유방임주의. 하이에크가 얘기하는 것은 결국에 비간섭 자유주의와 어느 정도 비슷해. 노예의 길. 비지배자유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시민이 되자는 것인데, 당연히 비지배자유를 언급해줘야 했는데, 이 사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 이건 자유에 대한 오독이야. 시장에 종속되는 것일 뿐이지. 시장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인데, 그에 종속되는 것이 정부에 종속되는 것과 뭐가 달라?

마지막으로, 하이에크는 ‘계획과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는 국가 활동 범위가 크기 때문에 계획경제는 민주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고 어려울 것이라고 했어. 제한된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민주적인 계획 경제의 성공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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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부터 37년까지 빈과 빈 주변에서 사회주의 정부가 지방자치정부가 들어섰어. 여기서는 10몇 년간 잘 돌아갔는데, 이걸 알아왔어. 비엔나가 사회주의 정권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가 있거든. 원래부터 경제중심지였기 때문에, 다음은 헌법에서의 지방자치제로 인해서 연방정부로부터 간섭을 잘 안 받았고. 사회주의 시 정부 이전에는./ 목표를 정해놓고. 시에서 아파트를 재분배. 시에서 여유 부지를 구입했어. 시 돈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대료나 권리금 제한이야. 이게 주택 정책이고. 세금은 소득 재분배적 세금을(누진세, 사치세, 재산세 등) 둔 거야. 그래서 이것으로 재원을 조달했어.


상일: 그런데 왜 망했어?


원진: 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쁘띠부르주아는 수혜자였어. 노동계급의 성장에 따라 쁘띠부르주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해. 노동계급에게. 위협감을 느끼고 가장 큰 것은, 가진 사람들.30년대 말에 사회주의자들이 쫓겨났다고. 이게 망한 이유야.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하면 경제가 망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반박이 이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다른 구역과 비교했을 때 빈의 실업률이 제일 낮았다고 해. 실업자들의 대부분은 철강 노동자였는데, 이때엔 철강 산업이 전체적으로 유럽에서 죽어가고 있었어. 전반적인 경기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거야. 책의 통계 중에서 볼 것이, 당시 오스트리아의 파산선고 비율인데 빈이 제일 낮더라.


상일: 반박을 좀 해보자면 빈은 상업 중심지라며. 사회주의를 하든 안하든 잘 사는 사람들이잖아.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원진: 그래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범위에서 안 된다고 하이에크가 말하는데, 그걸 반박하고자 들고 온 거야.


상일: 지방자치범위였지 않나.


원진: 계획 자체가 안 되는 것은 아냐. 제한된 영역에서는 민주적으로 가능하지 않나는 예시로 이 예를 든 거야. 국가적으로는 힘들 수도 있지. 빈에서는 딱 세금하고 주택에만 손을 댄 것이고. 이렇게 제한된 범위에서는 계획경제가 가능하지 않나. 국가단위는 모르겠지만.


현우: 빈에서의 결정과정은 어떻게 된거야?


원진: 시 의회, 행정부가 사회주의 연립정부가 장악했어.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서 시의회에서 하고. 주택위, 상임위를 두고 위원회에서 결정했어.


상일: 공부를 많이 했네. ㅋㅋ 하나 체크하고 싶은 것이, 애초에 하이에크는 시장이 인간의 기구라고 생각하지를 않았어.


원진: 거기에서도 모순점이 있는 것이 진리, 시장, 도덕 이런 것들이 외부에 있다고 얘기하지. 자연법적인. 보편타당한 뭔가가 있다고. 그런데 또 어느 부분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고 하나의 도덕을 정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게 모순되는 지점이 아닐까?


상일: 이 사람이 얘기하는 시장이라는 것은 말했듯이, 자연발생적인 거야. 누군가 만들었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교환과정에서 생기는 거야. 자연발생적 질서. 이 사람이 보기엔 이건 문제가 없는 것이지. 차라리 여기에 종속당하는 것은 자기 운명에 종속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 이것은 본인이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예 규제가 없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즉 차라리 시장이 나를 조지는 것은 국가가 나서서 나를 조지는 것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는 거야. (감정적으로)


원진: 그러면서도 시장을 위해 뭔가 제도를 만들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국에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모순인 것 같았어.


상일: 그건 약간 정도의 문제인 것 같아. 모순된다기보다는.


4-1. ‘자유’는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자유는 삶의 필수조건?

상일: 질문을 뽑아왔는데, 이 사람 책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냄새는 그래. 자유가 그 목적 자체인 것 같아. 뭔가를 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그저 인간은 자유로워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선목적을 세워놓고 논리를 끼워 맞추는 듯한 기운이 왔단 말이지. 그래서 자유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 얼마 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단 말이야.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해. 그렇다면 자유도 ‘행복’과 같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자유를 뺏긴 사람은 행복할 수 없냐? 또 다른 질문은, 자유가 정말 목적이라면, 그러한 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잠깐 동안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현우: 나도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자유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 같진 않아. 침팬지도 행복할 수 있지 않나. 하이에크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우리 사회를 하나의 게임처럼 만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 자유가 골이라고 상정한 후에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시장의 ‘룰’만 정해놓고 치고 박고 싸우라고 하는 것이지. 나는 골을 넣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느끼진 않아. 진짜 인생이나 사회를 놓고 봤을 때에는, 잔디를 뜯어먹고, 자살골 넣는 것. 이런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나. 자유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볼 수 있는가는 잘 모르겠어.

영화 「도리를 찾아서」를 봤는데 거기 문어가 나와. 아쿠아리움에 살던 문어가 있어. 걔는 바다에서의 삶이(바다 생물 중에서 치료해서 방생시키는 아쿠아리움인데) 너무 끔찍했던 것이지. 팔 잘려서 아쿠아리움으로 들어왔어. 걔는 오히려 바다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해. 아쿠아리움에 평생 갇혀서 먹이나 먹고 살고 싶다고 말해. 바다가 더 좋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고.자유가 짱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끝나. 그 문어를 보면서 저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자유가 없고 종속당해도 행복하면 괜찮지 않을까?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기보다는, 물론 중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은 아니지 않나. 자유를 제외하고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은 많아.


원진: 나는 조금 생각이 달라. 자유가 없으면 100퍼 행복할 수는 없어.어느 정도는 행복할 수 있겠지. 그래도 제도나 사람이나 자의적 권력 안에 놓이면 불행할 가능성이 항상 있는 거야. 그 가능성이 없어야지 행복이 달성될 수 있지 않나. 노비들도 보기에 따라서 행복해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항상 주인 안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건 완벽한 행복이 아니지 않나.그런 자의적인 무엇인가의 종속이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해.


4-2. 더 나은 자유를 위해 현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사회 행위자들의 가치관이 반-자유적이 될 수 있다

상일: 더 나은 자유를 위해서 잠깐 자유를 제한할 수 있나?


원진: 자유에 경중을 나누는 것인데, 그게 가능한가?


상일: 자유의 경중을 나누는 것 보다는, 처한 상황적 조건을 자유를 실현하는 데 더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잠깐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보면 될 듯. 예를 들면 가난하면 자유롭기 힘들지 않나. 때문에 가난을 타파하기 위해서 자유를 잠깐 내려놓는 상황이 있을 수 있지 않나.


원진: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뭘 의미하는거야. 독재와 같은 상황을 의미하는건가?


상일: 그런 셈이지


현우: 가난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전제는 깔고. 물질적 풍요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소

리지?


상일: 맞아.


원진: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로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 좀 떨어진다. 행복하기 위해서 자유로워야한다. 이게 대전제인데.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잠깐의 자유를 제한해야한다?


현우: 계획이든 자유경제든 확률은 반반아니야? 가능성을 동일하게 본다면 결국 장기 단기의 문제인데, 둘 다 성공한다고 치면. 오래 걸리더라도 자유롭게 가느냐. 짧게 걸리더라도 단기로 가느냐인데.


원진: 장기간에 걸치더라도 자유롭게 가야해. 확률이 반반이라면. 계획경제로 단기간에 해버리면 그 종속 시절에 그 사회의 가치관이나 감정이나 선호하는 모든 것들이 안티자유로 바뀌지 않을까. 그들을 데리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인들이 패전 이후에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계획경제나 자유를 종속하는 놈들이 지불할 값이긴 한데.


상일: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 중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나라가 없어서 사례를 못 찾았음ㅠㅠ


원진: 대부분 국가가 결국 민주주의를 10년 안에 포기하고 군부독재로 나아갔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뭐랄까... 이게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현우: 결국 매우 자유롭다는 것은 곧 자연 상태 아니냐? 쟁취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실현이 아니라 공이고 부재이다. 지배의 부재일뿐이지. 자연스럽게 사회가 무정부상태나 자연 상태 적으로 갈 수밖에 없고 군부독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택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5. 가족주의와 상속제
왜 상속제도만 비판하는가?

금수저.jpg 우리는 흔히 상속제도만을 공격한다

상일: 다음 질문은 상속제도에 관한 것이야. 이 사람이 신자유주의를 주창했는데, 시장방임주의라고 할 수 있잖아. 그냥 내버려두면 개인들이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어. 문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 부의 대물림이 심해졌고, 갖고 태어난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자유 역시 제한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졌고. 그것을 보정하는 작업이 있어야 했는데, 하이에크는 보정하지 않았어. 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결국 가족제도가 지속되는 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어.


현우: 그 부분이 어이없지. 가족제도가 유지될 것이라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나. 망하지 않을까.


원진: 상속제는 좀 비판할 수 있는 것 같아. 이 사람의 주장이 실현되려면 모두가 0을 갖고 있거나 모두가 100을 가져야해. 하지만 상속제가 존재하는 한 부는 계속 편중되지. 이게 보정이 되어야해. 상속세의 재원을 통해서 뭔가를 해준다든가.


상일: 그런데, 이 사람이 상속제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다른 반박논리도 들었어. 이거 좀 참신했는데, 왜 돈을 상속하는 것에는 그렇게 반발하면서 다른 형태의 상속에는 가만히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예를 들면 유전적 지능을 상속하는 것, 사회적인 인맥을 상속하는 것, 교육 환경을 상속하는 것. 가족제도 하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다 상속의 형태로 다음 세대로 전달돼.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자본 그 자체보다 다음 세대의 생활적 조건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곤 해. 그런데 사람들은 자본 상속만 물어뜯는다고. 이건 그저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닌가.(라고 하이에크는 주장한다.)


원진: 부르디외가 얘기했던 것이 효과적인 반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교육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다 이런 것들도 다 자본의 일종이야.


상일: 이 쪽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도 비슷하다. 다 자본인데, 왜 이 자본만 뭐라 하고 다른 자본들은 신경 쓰지 않는가. 다 찬성하든지 다 반대하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원진: 경제적 자본을 바탕으로 다 딸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머지는 경제적 자본에 종속된다는 것이지. 또 지능이라는 것도 논쟁이 많아. 천성이냐 후천적으로 한 것이냐 아니면 반반이냐. 이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지능이나 유전에 대한 것도 달라지지 않나. 하이에크는 개인의 지성이 유전이라고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거고.

현우: 이해는 되네. 지능이든 뭐든 사람이 태어날 때 일정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있을 수도 있지. 깔창을 어느 정도 갖고 태어나는 건데 왜 돈 깔창은 안 되냐.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발달심리학에서 배운 내용으로는, 아이의 성장 과정 중에서 지능적 성장이든 인지적 사고적 성장이든 집약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지. 이 때 환경적 서포트가 중요하다. 갖고 태어나는 것보다는. 딱히 유전적인 것이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상일: (하이에크의 주장)유전도 있지만, 문화자본이라는 것도 있어.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일종의 상속이라는 것이지. 가족체계 하에서는 모든 것이 상속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걸 타파하고 싶으면 스파르타인들처럼 아고게에 몰아넣고 균등한 동질의 교육을 제공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인데.


원진: 좋은 학교에 감으로써 문화자본을 습득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이 국립학교에 간다.충분히 하이에크 교육이나 인맥적인 부분을 까서 지금의 현대에 이른 것 같은데.


현우: 하이에크 말도 맞는 것 같은데?


상일: 통찰력 쩔긴 함. 물론 이건 반대를 위한 반대라서 딱히 대안제시를 하기 보다는 니들은 논리가 없어 빼액! 같은 식이라 뭔가 개운하지 못하지만.


현우: 모든 것은 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돈만 갖고 뭐라 하냐라는 주장이지? 나는 상속세는 걷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애들을 같은 교육을 시켜야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데. 이게 어렵네


상일: 이것도 감정적인 부분인데, 돈은 꽁으로 먹는 것 같고. 교육은 그래도 당사자가 노력은 했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못 가진 입장에서는 좀 더 억울하지. 감정적인 부분 외에 이 사람에 대한 비판은 롤스의 견해도 유효할 것 같아. 롤스는 모든 것을 운으로 봤다. 운을 대하는 태도가 하이에크랑은 달라. 하이에크는, “맞아 운이 결정적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너희가 그래서 어쩔건데.” 이런 입장이라면 롤스는, “다 운인데, 그래서 너희는 그걸 가질 자격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야. 때문에 운이 좋아서 좀 더 가졌다면 조금 내놓아야하지 않겠냐?” 하는 것이지.


현우: 그럼 공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나..


원진: 교육의 기회만 제공하면 되는 게 아닌가. 교육이라는 것은 능력 차이잖아. 중요한 것은 기회. 예를 들어 민사고의 커리큘럼이 정말 좋은 것이라면, 모두에게 민사고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따라오고 말고는 개인적 성취의 문제니까 그걸 건드릴 수는 없는데.

생각해보니까 정치성향테스트 할 때에도, 상속세 올려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외고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상일: 이 사람은 평등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꽤 날카롭게 파고들어. 근데 대안이 없음.


원진: 그런데 하이에크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지 않나. 대안을 제시해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사회공학이 되는 것이니까. 이건 계획이 아닌가. 문제의 원인에 대한 순수 비판에만 집중한 것이지.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로 시장이 외부적인 것이면 인간은 거기에 최대한 손을 안대는 것이 맞는 것이지. 지금을 유지하자는 것. 이게 듀이가 공격하던 이상한 자유주의가 아닐까.


현우: 원진이가 아까 말한,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 사회자본 이런 것들이 경제자본에 종속되어 따라온다는 것이 부의 상속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나.

개인의 성장에서만 봤을 때. 결국 돈에서 파생된다. 누군가 국회의원 친구를 두든. 다 경제활동에 묶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경제자본이 없는 문화적 사회적 자본의 유전이 어떻게 될 수 있나.


상일: 이게 0과 100의 문제라고 생각을 해서 헷갈릴 수 있는데, 실생활에서 그런 상황은 그리 많지 않아. 예를 들어서 지능 문화 인맥 자본이라는 스탯이 있다고 하자. 각각 100 50 50 50을 물려받은 사람이 50 50 50 100을 물려받은 사람보다 덜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현우: 결국 선천 후천성인데, 중간소득의 피아노 왕? 그런데, 만약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피아노 교육을 못 받으면 결국 선천적 능력은 후퇴된다는 것이지. 문화적 자본이나 사회적 자본에 선천적인 뭔가(재능)가 있다면. 결국 어린 나이에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배양이 돼야하는데, 경제적 조건이 없으면 원래의 잠재력보다 덜 배양되거나 아예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자본 상속에 그만큼 더 많은 비판이 가해진다는 것이지. 가장 가시적일뿐더러 경제자본 없이 다른 것들이 배양될 수 없기 때문에..


상일: 그니까 그 것은 사람들이 ‘왜’ 더 분개하는지,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지만 그래야한다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원진, 현우: 있는 것 아닌가?

상일: 방금도 말했지만, 나머지가 다 중간이라고 봤을 때 왜 돈을 더 물려받은 사람이 욕을 더 많이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이 사람 주장은 그니까 다 내버려 두라는, 결국엔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될 뿐이지만.


현우: 하이에크는 말하는 것이, 너희는 왜 다른 상속엔 아무 말도 안하면서 상속된 재산만 갖고 욕하는 것이냐는 것이지. 근데 이게 뭐라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상일: 대충 본질은 같다는 것이지, 이 사람 입장에선 돈도 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지.


원진: 결국엔 재반론이네.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 그래야한다는 논지는 아니야.


상일: 특이한 것이, 이게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이런 종류의 시기와 질투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병폐라고 봤고.


원진: 그니까 이 책 너무 기술적이야. 일차원적이고.

6. 결국


원진: 하이에크는 전제를 비판해야해. 아예 전제가 다르니까 얘기 방향이 다르다. 이 사람의 맹점은 전제에 있다고 본다. 밀이나 듀이 같은 사람을 진짜 자유주의자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 사람은 짜가 자유주의자야.


현우: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시키는 것보다. 그 상황 그대로 지가 알아서. 내버려두는 것? 이거 자유에 대한 오독인 것 같아. 개별성의 실현이 자유의 목적인데. 하이에크의 자유는 좀 아닌 것 같다. 박테리아들을 배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던져둬야한다는 느낌이다. 사회를 인큐베이터보다는 사바나 초원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살려는 주는데 발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볼 때 논리적으로 그냥 괜찮은 부분도 많았는데, 뭔가 그 부분을 읽을 때 들었던 느낌은 얘가 인간의 이성을 불신하지 않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너무 없다. 자유주의자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하는데.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게 말이 되나.


상일: 결국 뭘 위한 자유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자유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까 하는 숙고에서 나온 것인데.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주객전도가 아닌가. 시장에 대한 맹신으로 가득 차있고.


원진: 시장 전체주의가 아닌가.(ㅋ)


참고자료: 『노예의 길(The Road of selfdom)』,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김이석 역, 나남 출판, 2012

사진자료 출처: http://www.greanvillepost.com/2014/06/05/umberto-eco-memories-of-fascism-and-related-seductive-abominations/

https://eveneuhaus.com/category/red-vienna/

https://insightcities.com/our-walks/das-rote-wien-the-architecture-of-red-vienna-between-two-wars

http://hankookilbo.com/v/55ab15883e594dba8a5c2e6576ec5c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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