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여백의 미학

by 이병찬

[내 인생의 소설 제1화] 인간실격


설명이 불친절한 작품들이 있다. 이를 테면, 카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이 그렇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별다른 원한도 없는 아랍인을 총으로 쏜다.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포기하며, 자신이 사형 당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봐주기를 원한다.


뫼르소는 이렇게 반사회적 인물이지만 카뮈는 뫼르소가 어쩌다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어릴 때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는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카뮈는 뫼르소의 반사회적 성향을 당연한 전제로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이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가득차 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익살을 부리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인간 실격에서도 요조가 왜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 중요한 공백은 늘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요조가 이 정도로 인간을 무서워하고 혐오하려면 뭔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그걸 핍진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마다 마지막 한 조각이 사라진 직소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작품은 항구를 떠난 배처럼 작품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라 작품 뒤에 붙은 해설도 잘 읽지 않고, 저자에 대해서도 잘 찾아보지 않는 편인데, 인간 실격은 몇 번을 보아도 도저히 요조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작품 뒤에 수록된 해설을 펼쳐보았다.


해설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또다른 작품인 "고뇌의 연감" 중 일부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었다.


"나는 열아홉 살 먹은 고교생이었다. 반에서 나 혼자만 두드러지게 호사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인간 실격이라는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며, 비로소 완성된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요조라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한 다자이 오사무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친구들 사이에서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부끄러워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였고, 다자이 오사무는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을 쥐어짜서 벌어들인 돈에 기대어 풍족하게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인 요조 또한 자신만 특별하다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고, 이런 고통이 다른 사람을 병적으로 무서워하고 혐오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끝내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술과 약에 의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도대체 왜 다자이 오사무가 요조의 이런 배경을 끝까지 작품 내에서 설명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모나리자가 불멸의 작품이 된 이유는 눈꼬리와 입꼬리의 음영을 넣어 해석의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과 입술의 경계선이 모호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시선이나 각도, 혹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실격이 불멸의 명작으로 작품으로 남은 것도 요조가 왜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독자들이 읽는 내내 궁금증에 시달리도록 다자이 오사무가 일부러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을 뺀 것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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