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각 무침, 여름 밥상의 평화와 웃음을 가져다 줍니다.

by 정미남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아빠를 닮아 더위를 더 많이 타는 후끈후끈한 아이들과의 뜨거웠던 방학이 끝났습니다.


커피 한 잔 연하게 타서 홀짝거리며 두 아이의 아침을 차렸습니다.


저는 아침을 먹지 않지만 평소에도 늦잠을 자는 게 아니라면 꼭 아침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 밥을 먹이고,

아버님 아침 식사는 늘 하던 대로 따로 차려드리고 나면

아이들도 하나 둘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갑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나니 뭔가 고무줄이 팅-하고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손 발에 힘이 풀리고 갑자기 온 몸이 나른해지더라고요.


에어컨을 켜는 것도 깜빡하고 곧장 침대로 뛰어들어가 한 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숨 자고 나니

좀 개운해 지는 것 같습니다.

더 누워있고 싶지만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분 단위로 잔뜩 있는 하루네요.

(물론 분 단위로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제 성격도 한 몫을 합니다만. 하하)


다시 눕게 될까봐 진하게 라떼 한 잔 타고 가장 편안한 내 자리에서 노트북을 펼쳐두는데 사방이 조용하니

오랜만의 이 정적이 너무나 어색하네요.


물론 30분 뒤면 다시 불 앞에서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이 1분 1초가 야무지게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시어른들이 계시면 삼시세끼를 꼬박 먹게 됩니다.

사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수 있지만, 텃밭이 있는 시골에 사는 것도 아닌데 부지런한 두 분 덕분에

옥상에서 농사 지은 싱싱하고 깨끗한 채소들로 밥상을 채워 먹을 수 있다는 건

어느 가정집에서나 할 수 있는 흔한 일은 아니지요.

게다가 사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예민한 위장을 지닌 며느리는

집밥이 너무 좋아서 요리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아 물론 설거지는 아닙니다만 ㅋㅋ)



올해는 노각을 처음 심으셨는데 어찌나 농사가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꼼꼼한 성격의 시아빠는 몇 일에 몇 개나 수확했는지 적어두셨는데

올 해 첫 농사로만 40개가 넘는 노각을 먹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물 주고, 저녁에 또 물 주고 벌레도 잡고 해서 키운거야.

노각은 정말 비룟값 뽑고도 남았어"


아버님의 약간의 귀여운 생색도 빠질 수 없습니다.

시엄마는 그런 시아빠를 향해 약간 눈을 흘기시긴 해도,

손주들이 잘 먹으니 그래도 애 썼다며 칭찬을 해주십니다.

워낙 잘 투닥거리시는 두 분이지만 노각 잘 키운 것은 인정 또 인정.

노각 덕분에 참으로 훈훈합니다.




저희는 노각을 소금에 절이지 않고 시엄마표 달큰한 매실청에 절여두었다가 무쳐먹는데,

수분이 쪽 빠져나가 오독오독한 식감은 물론 은은한 단 맛 때문에 그냥 그대로 먹어도 어찌나 맛이 좋은지 모릅니다.

매실청에 절인 노각은 꼬옥 짜서 고춧가루, 마늘 정도만 넣어 버무립니다.


한 번은 노각이 아직 덜 여물어서 마트에서 구매해서 같은 방식으로 무쳐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사 먹는 것과 정말 비교가 안 되는 맛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큰 딸아이가 귀신같이 알아채더라고요.


두 분의 노고 덕분에 노각무침은 올 여름 아이들에게도 식탁에서 빠지면 안되는 시그니처 반찬이 되었습니다.

부추도 수확이 많아서 전도 해먹고, 김치도 담궈 먹었고요.

지금보다 해가 덜 뜨거웠을 땐 종류별 쌈채소로 늘 식탁이 초록초록 했었답니다.


직접 요리를 해야 하지만, 압도적인 맛 때문에 저는 요리하고 집밥을 해먹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손 맛 좋은 시엄마와 바지런한 시아빠 덕분에 늘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밥순이 며느리에게는 크나큰 기쁨입니다.


오늘도 노각 무침과 어제 해둔 김치찌개로 속 편안하고 맛좋은 점심을 먹어야겠네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월드의 이상한 며느리_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