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트레바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수영 Jan 02. 2020

얼마나, 어디까지 상상하며 살 것인가

<피터 팬> 독후감

가끔 길을 걷다 보면 도보에 그려진 흰 선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밟고 다니는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지금 나름의 모험을 하는 중이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허공에다 공갈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만날 때도 있다.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들은 굉장히 중요한 적과 맞서 싸우는 중이라고 대답해 준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릴 때는 현실과 상상이 뒤엉켜 있었다. 방에다가 장난감과 레고를 늘어놓는 순간 나는 창조주가 되기도 했고, 중세의 용사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 단짝이었던, 두툼하고 희여멀건했던 친구는 아파트 단지에서만큼은 누군지도 모를 악당을 함께 무찌르는 용감한 동료로 변신했다. 마이구미를 먹을 때마다 왠지 이번 마이구미에는 엄청난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나를 어딘가로 데려갈 것 같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기대는 나를 저버렸지만 나는 매번 젤리 봉지를 뜯을 때마다 가슴 벅차할 줄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 상상을 몰아낸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스스로 현실의 영토를 좁게 만들고 있다. 더이상 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실제로 날 수 없게 된 네버랜드의 아이들처럼. 가끔 어처구니없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어처구니없을만큼 해맑은 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삶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큼은 아직도 자라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알기론 위대한 몇몇 기업의 창업자들, 존경하는 몇몇 정치인들, 그리고 더없이 사랑하는 몇몇 예술가들이 서른, 아니 환갑을 넘고도 아이의 표정을 지었다.


어른들도 할 말이 있다. 아이가 마음껏 상상의 세계에서 뛰놀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은 반사회적인 무책임함을 필요로 한다. 피터 팬은 거의 모든 의무를 거부하고, 그 어떤 속박적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순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호기심과 재미를 위해 개미 구멍에 콜라를 붓고, 잠자리 대가리를 뜯는 자기중심적인 잔인함 역시 아이들의 고유한 모습 중 하나다. 웬디도 말했다. "오직 쾌활하고 순수하고 매정한 사람만이 날 수 있다"고. 날기 위해서는 마음껏 상상하고, 자신이 상상한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하지만, 매정하기도 해야 한다. 내가 알기론 위대한 몇몇 기업의 창업자들, 존경하는 몇몇 정치인들, 그리고 더없이 사랑하는 몇몇 예술가들이 그랬다. 그들은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누구보다 매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의 영토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상상이 우리를 날게 해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각을 한다는 건 실제로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꼭 현실에서 이루어져야만 상상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상상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혼자서 환상을 만들어낼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그래서 소설을 읽고,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한 평도 안 되던 내 작은 방에서 세상을, 역사를 창조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상상은 우리 모두를 권태 없는 두근거림과 위험 없는 모험으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상상은 매우 공평하다. 다른 이의 상상 속에서 서펜타인 호수 위에 패랭이꽃이 피어도 나의 서펜타인 호수에서는 내가 원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결국 모든 중요한 문제가 그렇듯 답은 '적당히'라는 애매모호한 단어에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은 명쾌함에 좀 지쳐 있다. 복잡하게 뒤얽힌 세상에서 사이다가 웬말이냐) 늘 스스로에게 묻자. 얼마나 상상하고 살 것인가? 어디까지 상상하고 살 것인가? 어디까지 무책임해질 것인가? 어디까지 쾌활해질 것인가? 다행히 <피터 팬>에는 정답과도 같은 문장이 있다.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언제나 부지런히 뭔가를 하며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모두 피터 팬을 알고 있다. 디즈니 덕분이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제임스 배리의 <피터 팬>을 읽은 적이 없다. 제임스 배리의 <피터 팬>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있고, 무엇을 잃고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만 하고, 무엇은 잃지 말아야 할까. 피터 팬은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꼭 해야 할 고민들을 재미있게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트레바리 #독후감 #피터팬 #무경계리브레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의 윤수영을 만든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