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충북 진천을 다녀왔다. 독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생활하는 터전에 초대했다. 고려 때 돌로 쌓은 ‘농다리’를 지나 ‘하늘다리’로 가는 길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라 직감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저릿했다.
지난 10년간 서울에서 삶이 조금 지쳤던 모양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설레고 즐거웠던 적도 많았지만, 견디며 버티고 빚 갚는 일이 가끔 힘에 부쳤다. 그 무게가 차츰 쌓였던 게 아닐까. 신경 쓸 게 많았다. 여의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치, 사회를 선도한다는 기업, 각종 노동문제로 탄압받아 거리로 내몰려 아픈 사람들까지. 다양한 이슈에 이해와 공감을 하려고 안테나를 바짝 세웠다.
하늘 다리를 건너며 시간을 멈춘 순간이다. 지금이 영원하면 좋겠다는 열망을 숨기지 못했다. 막연히 진천에 머물고 싶었으나 그 마음에 도취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태 도시에서 살아온 내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다니, 치열한 준비 없는 망상이었다.
자동차에서 하늘을 발견했다. 고개 들지 않아도 제 발로 하늘이 찾아왔다. 자동차와 하늘, 두 소재가 연상 작용이 덜해 낯선 느낌이다. 바꿔 생각하면 새로운 조합을 통해 특별한 이미지로 거듭났다. 익숙해서 견고한, 무거운 관념 덩어리가 표피를 벗고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사소한 발견은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매일 가슴 떨리는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설렜던 하루는 익숙해지고, 따분해진다. 권태가 우리를 덮칠 때 그에 맞는 처방이 필요하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익숙했던 것을 조금씩 떠나보내자.
도시는 자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풀이를 넓게 해석하면 좋겠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여 자연이 아니라면, 자연의 범위는 매우 좁아진다.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인간이 자연과 친근하게 관계 맺으려 도시를 바꿔 간다면? 그러한 도시는 ‘자연’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차츰 스스로, 자연을 닮아갈 테니.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클로즈업하면 비극이지만, 롱샷으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우리도 멀리서 큰 그림으로 보자. 나무보다 숲을 보자. 너무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점차 매몰되고, 자연스레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세하게만 본다면 점차 수렁으로 빠질 것 같아 두렵다. 그러니 즐거이 살고 싶은 마음을, 고이 잘 보관해 함께 늙어가는 건 어떨까. 조금 더 냉철하게 관조하며 살아가면 좋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