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아 랩탑을 켜고 키보드에 손을 얹은 지 30분이 지났지만 손가락 끝은 여전히 갈 곳을 잃었다. 산뜻한 첫 문장을 찾아가는 길을 잃은 것이다. 고단한 일과에 머리가 멍해진 탓인지 아니면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손 끝을 누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책상에 앉기 전까지만 해도 독자의 시선을 냉큼 붙잡아 두는 참신한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잡힐 듯 말 듯 떠다녔다. 읽기를 아껴두었던 에세이 단편집 수 권을 읽으면서도 이런 자연스러운 문장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문득 글감이 떠오르면 하던 것을 멈추고 전봇대 마냥 서서 머리를 박고 메모를 했다. 그때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출간 작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멋진 한 편의 에세이를 뚝딱 해치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내쳐진 부랑아가 된 기분이다. 어쨌든 첫 문장을 억지로 써본다. 이토록 진부하고 진부하고 진부할 줄이야.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한참을 나무란다. 또 그렇게 30분이 지나 버리면 어제처럼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랩탑을 닫고 맥주를 사러 밖으로 미끄러져 나갈 것이다. 한 달 가까이 이런 데자뷔가 반복되는 것이 지겨울 법도 한데 나도 도리가 없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면 이런 악몽은 꿈꾸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 이게 다 내가 글을 쓸 깜냥도 안돼서 그런 것이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어떤 함의나 복선을 독자의 눈과 마음에 은연중에 심어놓을 수 있는 첫 문장이 쓰고 싶다. 나의 투박한 관점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관조하는 글을 쓰고 싶다. 세상이 좋아지는데 미약하게나마 거들 수 있는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여태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이다지도 부끄러울 수가 없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써 내려간 글인 것을 알지만 아궁이에 욱여넣은 장작처럼 구조도 빈약하고 두서가 없다. 지식이 약하고 좁을수록 검증되지 않는 생각과 믿음으로 글을 쓴다는데 그게 나인 듯 했다. 나조차도 고개가 왼쪽으로 가우뚱 기우면서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아.. 이건 좀… 심하네’
전문적인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글쓰기 서적도 찾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의 꼴사나운 자존심이 불필요하다고 말을 했었다. 그냥 쓰면 되는데 굳이 그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냐 하고 말이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나의 글쓰기 밑천은 가랑비 세차게 내린 후 잠시 고인 물웅덩이처럼 얕고 탁했다. 글쓰기는 나를 점점 좁아지는 비탈길로 몰더니 어느새 벼랑 앞까지를 내세웠다. 예를 들어 비판적 에세이를 쓸 때 자료 조사와 분석이 충분하지 않았거나 핵심주제와 이야기 흐름을 사전에 정리하지 못하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이도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용하려고 메모해 두었던 인용문을 찾지 못해 짜증이 나고 있다. 인용문을 찾으려고 희미해진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읽었던 책들을 다시 속독하는 나 자신이 그리 썩 유쾌하진 않다. 도대체 나는 이토록 허점투성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에 비해 능력은 저 반대편 안개 속 먼 곳에 있는 셈이다.
미국의 작가 앤 마로트는 ‘쓰기의 감각’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한 없이 개똥보다 못한 나의 초고를 보며 벼랑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로드런너(루니툰에 나오는 코요테)는 ‘나’인 것이다. 한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랩탑 화면을 바라보며 애꿎은 손을 비비거나 발을 심하게 떨면서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다가 무기력하고 공허한 채로 꼼짝없이 장벽에 압도되어 신음조차 못내다가 방을 박차고 맥주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지금 이런 도망이 벌써 한 달째 되어가고 있다. 말은 호기로웠지만. 어쨌든 지식이 얕고 좁으니 깊게 넓혀야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바쁜 생활에서도 매달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 줄을 긋고 여백을 생각으로 채우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책을 덮었다. 그렇게 해서 실력이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서서히 일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사그라져가던 나의 글쓰기 욕망에 불을 붙여주는 불쏘시개가 되어 나를 따뜻히 위로해 주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쓰기는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동기는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달리기가 그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절대 그만둘 수 없다면서 만약 바쁘다는 이유로 달리기를 그만둔다면 평생 달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달리기를 대하는 마음처럼 매일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글을 수십 년째 쓰고 있다. 그는 또 말했다. 글쓰기가 매일 계속되면 후천적으로 집중력과 지속력이 (의식하지 못할 수준이지만) 아주 조금씩 올려간다고. 마치 매일 달리기를 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Runner)로서 체형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의 연료는 인내와 노력뿐일 것이다.
나도 고백하건대 러너이다. 지난 10년간 나는 약 2,950km를 달렸다. 달리기를 통해 마음의 근육을 길렀던 나이기에 그로부터 큰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물론 감히 내가 그와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의 위로가 나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다른 여러 작가들 모두 책에서 글을 쓰라고 말해주었다. 멈추지 말라고 했다. 개똥 같은 엉터리 ‘초고’라도 좋으니 쓰라고 했다. 비교당하고 비판받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쓰라고 했다. 초벌하고 재벌 하고 삼벌을 하더라도 진실을 담으라고 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동력을 글쓰기에서 찾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게 있어 글쓰기는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무거운 도구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가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산다는 것의 메타포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커다란 작가의 장벽도 어쩌면 쓴맛을 맛봐야 단맛을 느낄 수 있다는 메타포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계속 써야겠다. 암, 그렇고 말고. 물론 책상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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