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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칸스 Feb 23. 2023

불공평하게만 느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나는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나쁜 짓을 해도 금방 풀려나 정부의 혜택을 받으며 생계를 누리는데, 누구는 어릴 때부터 온갖 고난이라는 다 겪고도 여전히 헤쳐나가야 하는 일들이 가득하니 말이다. 도대체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 수많은 고난들로 인해 삶이 참 지칠 때가 많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만 수천 번 했고, 자살시도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런데 참 잔인하게도 누군가는 예상치 못하게 사고로 죽어버리는데, 정작 죽으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살리게 한다. 모순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 세상,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와 같은 생각들은 전생을 듣고 더 강하게 들었다. 살아온 어느 세월보다 그 순간이 가장 억울했다. 누구보다 빡세게 살아왔는데, 겨우겨우 숨을 내쉬며 살아왔는데, 이제 시작이란다. 그동안의 과거들은 지금의 수행을 해내기 위해 나를 단련시킨 것이었단다. 이젠 진짜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니. 이것을 넘어야 나의 인생 숙제가 끝이 나고, 레벨업을 할 수 있다니. 포기하자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아깝고, 마주하자니 덜컥 겁이 난다. 누구는 세상 편하게 살아가는데 누구는 끝없이 수행을 하고, 이보다 불공평할 수 있을까 싶다.


사진: Unsplash의whoislimos


하지만 사주명리학, 철학, 종교 등을 공부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세상을 따뜻하게 보게 된다. 누군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 누군가 갑자기 구설수에 오르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주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되면서, 이전에는 부러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분노하던 것들이 평온한 상태로 바라보게 된다. 더불어 인연법, 업보에 대해 알게 되면 모두가 각자 지니고 있는 숙제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누군가는 전생에 베풂을 많이 받았기에 이번 생에는 희생을 많이 해야 하는 반면, 누군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에 이번 생에는 그에 대한 보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업보.

그것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리도 힘들게 하는 것일까.

흔히들 업보라 하면,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현생에 고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부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그것을 베풀고 주는 것, 누군가에게 베풀었으면 그에 맞는 도움을 받는 것, 수행해야 하는 일이 있는 데 그것을 등한시했을 때 다음 생까지 이어지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업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업보를 알게 되면 원망부터 든다. "왜 그런 선택을 해 가지고!!"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생의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업보를 풀기 위해 스스로가 선택하고 이번 생에 그 업보를 풀고 있는 중인 거다. 그저 인간의 몸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기억 못 할 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본인의 몫이지만,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면 결국 그 업보를 평생 이어질 것이고, 이번 생이 결코 평탄치 많은 못할 것이다. 암만 스스로 다른 방법을 써보겠다고 난리 블루스를 쳐도 태어나기 전에 본인이 한 선택이며,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기에 풀릴 듯 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풀릴 듯 풀리지 않는 그 딜레마는 인간의 삶에서는 가혹해 보일지 몰라도 하늘이 그대에게 보내는 메세지 인거다. 그 딜레마 속으로 들어가서 답을 발견해 업보를 풀라는 메세지 말이다. 사실 답은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받아들이기 싫어서 외면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 분명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 역시 수많은 일을 겪고도 그것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까. 그럴 땐 마음껏 저항하고 거부했으면 한다.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거 억지로 받아들이면 본인이 그것을 왜 행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수행하다 결국 던져버릴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마음껏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본인의 삶,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본인의 삶, 억울하고 서럽고 거부감 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음껏 인간으로서의 서러운 마음을 표출하고 알아주어야만 그 자리가 비워져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그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자신만의 공간에 표출해야만(꺼내야만) 내부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



여전히 삶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이 들 거다. 나는 어마어마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의 누군가는 깔깔깔 웃으며 고통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수행이 있을 거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닌지라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만약 평생토록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자신의 업보를 죽어서도 지고 갈 운명인 거니 어찌 보면 그것이 더 안타까운 삶이 아닐까.



이번 생만 두고 보면 인생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사 전체를 두고 보면 결코 불공평하지 않다.

모두 다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태어났고, 모두 다 취약점을 가지고 태어났고, 모두 다 한 번쯤 인생이 크게 흔들리고, 모두 다 한 번쯤 인생이 위로 상승한다. 그저 그 순간들이 짧아서, 힘듦은 크게 다가오고 행복은 소소하게 다가와서,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도움받은 전생 선생님

010-7434-4707 (문자예약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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