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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May 03. 2021

정류장과 정거장의 차이를 아세요?

같지만 다른


최근 '놀면 뭐하니'에 나온 SG워너비를 보고, 뒤늦게 이석훈에게 빠져버린 나. 끈질기게 그의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특히 '고백'과 '정거장'이라는 노래를 질리도록 틀었다. 나 때문에 강제로 매일 똑같은 음악을 듣게 된 남편이 물었다.


"그런데, 정류장이랑 정거장이랑 뭐가 다른 거야?"

"응?"

"장범준의 정류장이란 노래도 있잖아. 갑자기 궁금해서"

"이적의 정류장이거든?"


몇 살 차이 안 나는 연하 남편과 세대차이를 느끼며, 나 역시 궁금증이 들었다. 가장 원초적인 방법, 국어사전부터 찾아보자.


- 정류장 (停留場) 버스나 택시 따위가 사람을 태우거나 내려 주기 위하여 머무르는 일정한 장소.

- 정거장 (停車場) 버스나 열차가 일정하게 머무르도록 정하여진 장소. 승객이 타고 내리거나 화물을 싣거나 내리는 곳이다.


정류장의 '류'는 머무를 류자를 쓴다. 국어사전 풀이에도  부분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정거장 역시 풀이는 비슷하다. 단어 자체를 놓고 봤을 때 유일하게 다른 '거'자는 수레 거, 즉 운송수단 자체를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정류장에서 말하는 운송수단은 버스나 택시를 주로 가리키고, 정거장은 열차를 포함한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는 주체가 승객뿐만이 아니라 화물도 포함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거장이 좀 더 포괄적이다.


이것만으로는 아쉽다. 정류장, 정거장 두 노래의 가사를 분석해보자.


패닉 <정류장>

해질 무렵 바람도 몹시 불던 날,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창가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 어쩌지도 못한 채 난 그저 멍할 뿐이었지. 난 왜 이리 바본지 어리석은지 모진 세상이란 걸 아직 모르는지 터지는 울음 입술 물어 삼키며 내려야지 일어설 때, 저 멀리 가까워오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도 없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댈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이 흘러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오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 낙엽이 뒹굴고 있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까치발 들고 내 얼굴 찾아 헤매는 내가 사준 옷을 또 입고 온 그댈 봤을 때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는 엄마를 발견한 아들의 심정을 가사로 썼다고 들었다. 이적의 노래는 멜로디도 훌륭하지만 역시 가사가 예술이다.


화자는 현재 버스 안에 앉아있다. 해질 무렵,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리고 있단 말이다. 터지는 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 안 좋은 일을 겪은 것이 분명하다. 모진 세상이라는 표현에서 추측하건대 아마도 청춘을 관통하는 시절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 버스 정류장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미련하고 애달픈 어머니, 바로 그 모습이다. 화자는 내렸고 어머니를 꼭 껴안아 온기로 감사함을 전했다.





이석훈 <정거장>

눈치 없이 눈물이 나.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햇볕이 드는 정거장에 서서 잠시 또 널 생각해.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 지나가는 추억들을 볼 때마다 비워진 옆 자리가 슬퍼. 바쁜 생활의 순간일 뿐, 나의 하루에 끝엔 니가 너의 기억이 날 찾아와 또 가슴을 아프게 해. 사랑한다 크게 소리쳐 불러봐도 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텅 빈 공간 메아리만 가득해. 스쳐간다 우리 사랑했었던 거리도 처음 입맞춤했던 그 골목도 내 미소도 너는 모두 다 잊었나.


최근 연인과 이별을 한 화자는 버스 정거장에 서있다. 버스가 도착해 탑승했다. 버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헤어진 연인을 떠올린다. 버스 경로는 아마도 그녀(그)와 수없이 오가던 추억의 장소, 골목길 어귀를 거칠 것이다. 버스를 타고 누비는 곳곳마다 빛바랜 추억을 발견하고 아파하고 있다.


이적의 <정류장>은 주인공이 버스 안에 타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린다. 이석훈의 <정거장>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정류장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일까, '머무르는 사람'을 관찰하며 몰입하도록 가사가 흘러간다. 힘들고 지칠 때, 알고 보니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얼마나 든든하고 벅차오르는가! 머무르고 기다려주는 사람, 그 사람은 정류장에 서있다.


정거장은 운송수단인 '차'를 강조하다 보니 '차'가 나에게 다가온다. 정류장에서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갔지만, 정거장에서는 차가 나에게 온다. 그동안은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차를 탔다고 끝이 아니다. 더 깊은 심연으로 나를 몰고 가기도 한다.


인생에는 정류장과 정거장이 함께 존재한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때로는 목적지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중간에 내려야 할 때도 있고, 실수로 엉뚱한 곳에 내리는 바람에 낙엽이 뒹구는 정류장에서 한참을 서있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 버스는 다시 온다.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말길.   


잠시 멈추어 머무를 공간, 시간에 틈이 생겼다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의 소중함을 돌아보라는 신호 아닐까. 두 노래 가사 속 어머니와 연인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둘 다 명곡이란 말이지...







내일, 캐리브래드슈 작가님은 '남편'과 '애아빠'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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