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Feb 15. 2023

종이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요

전자책 구독은 '이것'이 아쉽더라고


책은 냄새입니다. 모든 책은 태생적으로 나무의 냄새를 지니고 있지요. 갓 구운 빵이나 금방 볶은 커피가 그렇듯이 막 인쇄된 책은 특유의 신선한 냄새로 당신을 유혹합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면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나지요. 포도알 같은 글자들이 발효되면서 내는 시간의 맛입니다. 책은 소리입니다. 책과 책 사이를 자박이며 걷는 조용한 발소리,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연필이 종이를 살을 스치는 소리. 그 소리는 사과 깎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당신은 사과 한 알을 천천히 베어 먹듯이 과즙과 육질을 음미하며 한 권의 책을 맛있게 먹습니다.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프롤로그




체험판에 발가락을 담그는 순간 끝이다. 유튜브 무료 체험 1개월을 한 후, 주저 없이 정기 구독 신청을 해버렸다. 광고 없이 영상과 음악을 마음껏 보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맛집처럼 어떤 경험은 그 전의 나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다.     


주변에 많은 독서가가 ‘전자책’ 구독을 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종이책을 고수했다. 이북이 필요할 때는 사서 읽으면 되지, 어차피 내가 그 많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읽기도 힘들거니와 정작 내가 보고 싶은 책은 거기에 없잖아! 했다. 하지만 전자책 무료 체험 한 달을 경험한 후, 나는 또 1년 결제 신청을 누르고 말았다.      


서점에 가면 제목이나 표지가 끌리는 책 위주로 들춰보며 목차를 읽어보곤 했다. 꼭 구매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글쟁이의 호기심과 책임감이랄까. ‘아, 이런 주제도 글이 되는구나’ 대단한 발견을 한 듯 기뻐했는데 전자책은 동선까지 아껴줬다. 스마트폰 앱에 접속하면 매일 신상(!) 책들이 반짝반짝한 구두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나는 눈치 볼 사람도 없이 마음껏 이 구두 저 구두에 발을 넣었다 뺐다. 밤에 잠이 안 올 때도, 화장실에서도, 대중교통 안에서도 나의 아이쇼핑은 계속됐다.     


전자책 구독은 언제 어디서든 책의 세계로 접속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종이책 독서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완독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마음에 드는 부분만 읽어도 되고, 읽다가 재미없으면 내팽개쳐도 되는 물건이 책이다. 안 그래도 읽고 싶은 책이 쌓여있는데 꾸역꾸역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다만 책의 진가를 알아보기도 전에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릇하는 습관이 문제였다.      


나는 어릴 때와 달리 뷔페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과식을 하게 되는 것은 둘째치고 허망함 때문이다. 알록달록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이 음식을 내가 다 먹어도 된다는 행복한 상황 앞에서 나의 작은 위장은 시무룩해지고 만다. 내 것인데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상황. 배가 부르게 실컷 먹었는데도 못 다 먹은 것에 대한 아쉬움. 전자책 구독은 나에게 뷔페 음식처럼 느껴졌다.     


종이책을 살 때는 소장을 전제로 하니 고민을 많이 하고 산다. 물론 중고로 판매도 하지만, 그렇게 읽을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경우가 많다. 내 좁은 방 한편에 부피를 차지하게 될 녀석, 내용은 당연히 좋아야 하고 가격도 따져 보게 된다. ‘이 가격에 사도 아깝지 않을 책인가’. 책을 쓰는 사람의 노고를 알기에 만 오천 원을 지불하고 아까울 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괜히 꼼꼼한 소비자가 된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책 한 권과의 대면은 오직 나만을 위한 밥상이 눈앞에 차려진 것처럼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고르고 고른 종이 책도 때로는 실패하고, 가끔 성공한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아니 기대 이상의 통찰과 재미를 안겨준 책을 만났을 때 환호한다. 허은실 시인의 말처럼 과즙과 육질을 음미하면서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즐긴다.      


넘어가는 책장 소리는 잔잔한 뿌듯함을 건넨다. 왼쪽 페이지는 두툼해지고 오른쪽 페이지는 홀쭉해진다. 부피감의 변화 속도는 얼마나 책에 몰입했느냐에 달려있다. 빠르게 줄어드는 오른쪽 두께가 안타까운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일부러 아쉬울 때 책장을 덮기도 한다. 맛있는 반찬을 가장 마지막에 먹는 것처럼 아껴 읽는 것이다.      


종이책이 주는 입체적인 감각은 소중하다. 전자책 구독을 끊지 못하지만 종이책의 멸종을 걱정하지 않는다. 독서가라면 온몸으로 읽는 체험의 즐거움을 잘 알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