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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l 14. 2023

방송작가, 나의 전생 이야기

전생이어서 다행이다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은 사람을 흔히 ‘종합병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나는 종합병원 중에서도 의사가 진료의뢰서를 써줘야 보험이 가능한 상급 대학병원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괴롭힌 아토피성피부염은 ‘피부과’. 30대 내내 소화장애로 고생했으니 ‘내과’,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으니 ‘신경외과’, 자궁내막증으로 정기검진을 받으니 ‘부인과’, 주기적으로 편두통 약을 타러 가야 하니 ‘신경과’. 이쯤 되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금은 예전보다 병원 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고,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뜻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프면 언제든 병원에 갈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는 점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전생처럼 느껴지는, 방송작가로 일할 때였다. 정시 퇴근을 하고 꼬박꼬박 주말을 쉬는 일을 해도 성하기 힘든 약한 체력으로 불규칙하고 시간에 쫓기는 직업을 택한 것이다.      


학교 다닐 때 국어 과목을 가장 좋아했던 나는 어른이 되면 막연히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국어 교사를 하면 어떨까, 알아보니 애초에 학과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교육대학원을 다니고 임용고시까지 보아야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설가가 될 만큼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이참. 뭐 하지, 뭐 하지...’ 하다가 우연히 흘러간 곳이 방송계였다. 구성작가는 대학 간판이나 학과, 토익 점수를 보지 않았다. ‘버티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정글 같은 세계였다.      


시작은 쉬워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막내작가로 함께 일을 시작한 동료 중 서브작가가 되고, 또 메인작가가 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는 이의 수가 점점 줄었다. 몸이 아파서 그만둔 친구, 급여가 적어서 그만둔 친구, 자유가 없어서 그만둔 친구, ‘기 센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그만둔 친구... 하나 둘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10년 넘게 방송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버티다 보니 세월이 흘렀다.      


일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마감 시간에 쫓기니 늘 초조했다. 마음만 불편하면 다행이었다. 당시에는 실내 흡연을 법으로 규제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유일한 비흡연자에, 막내였던 나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실내에서 싫은 티도 못 내고 밤을 새워 생방송 원고를 썼다. 피부가 따갑고 눈물이 났다. 잔기침이 나올 것 같아도 선배들에게 눈치가 보여 목울대에 힘을 주어 기침을 삼켰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폭력적인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생방송을 담배 없이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나는 한 명이었고 그들은 다수였다. 나는 막내였고 그들은 하늘 같은 선배였다. 나의 아토피와 안구건조증, 알레르기 따위는 ‘위대한 방송’ 앞에 하찮았다.     


시간은 늘 부족하고 글을 쓸 연료는 넣어야 하니 식사는 무조건 배달 음식이었다. 아토피에 해롭다는 햄버거, 짜장면을 번갈아 시켜 먹고 가려움증에 목과 팔을 벅벅 긁어댔다. 회사에서 밤을 새울 때는 엄마가 지어주신 한약을 여러 팩 챙겨갔다. 한 팩 뜯어서 호로록 마신 다음, 쏟아지는 잠을 내몰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시 뱃속으로 들이부었다. 휴대폰 알람에 놀라 시계를 보면 이제 1시간이나 지난 것 같은데 6시간이 흘러있었다. 다시 한약을 먹을 시간이다. 전자레인지에 30초 데운 한약을 코를 잡고 마신 다음, 팀장님이 사다 주신 박카스를 집어넣을 차례. 노트북 옆에는 한약 팩,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컵, 한약 팩, 박카스 병, 한약 팩, 핫식스 캔이 전리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뱃속에서 ‘핵불닭볶음면’을 먹은 것처럼 불이 나기도 했다. 병원은 언감생심이었다. 그 새벽에 문을 연 병원이 있을 리 없고, 낮이라 해도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취재 중이던 ‘모텔방 살인 사건’에 더 밝혀진 상황이 있는지 담당 수사관과 통화했다. 피디가 찍어온 촬영 원본 테이프를 돌려보며 피가 낭자한 사건 현장을 모자이크 없이 지켜보며 손가락으로는 쉴 새 없이 타이핑을 했다.      


방송을 하나 끝내고 나면 ‘이번 쉬는 날에는 병원에 꼭 가봐야지’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휴무는 마술처럼 사라졌고 다시 일하러 갈 아침이 밝았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작가 피디가 아프다고 병원에 다니고 휴가를 쓰고 주말에 쉬고 공휴일에 놀면 돌아갈 수 없는 게 방송이니까. 내 건강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나는 버티고 버텨서 메인작가가 되고 싶었다. 선배들을 돕는 역할이 아닌, 진짜 내 글을 쓰는 작가. 이왕이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휴먼다큐 작가가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 그러면 그동안 했던 고생은 모두 보상받을 거라고, 그때쯤이면 돈도 어느 정도 벌 테고 병원 갈 시간 여유 정도는 있을 거라고 믿었다.      


방송 일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메인작가가 되었다. 기쁨도 잠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바닥을 떠났다. 달라진 건 없었다. 나의 체력과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는 현실도, 애써서 번 돈을 모두 병원비로 써야 하는 상황도. 후배들까지 챙겨야 하는 책임의 무게만 더 버거워졌을 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생은 어느 한 지점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새로운 점을 찍는 일이라는 것을. 하루가 건강하지 않으면 일생이 건강하기 어렵다는 진리를. 그래서 예상과 달리 그리 멋지지 않은 메인작가가 되었을 때 나는 허탈했다. 


10년 동안 커리어를 쌓은 유능하고 활력 넘치는 방송작가가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췌했고 그저 피로와 무기력에 절어있는 환자였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아니, 이 일을 나는 진짜로 하고 싶은가. 몸이 아프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일이 정말 그것을 감당할 만큼 보람된가. 거울 속 환자가 나에게 물었다. 조그만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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