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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un 28. 2023

명품 백이 없는 메인 작가님

나의 '소로' 선배


결혼식을 갈 때마다 꺼내 드는 조그마한 펜디 백. 결혼할 때 시어머니가 사주신 선물로 내가 가진 유일한 명품 백이다. 마흔이 되고 나니 결혼식도 잘 없어 그나마도 들 일이 없다. 내 나이쯤 되면 명품 백을 종류별로 몇 개씩 들고 있는 이들도 흔하지만 나는 큰 흥미가 없다. 가방뿐만 아니라 옷 가짓수도 적은 편이다. 어릴 적 어려운 형편 때문에 악착같이 아껴 쓰는 부모 밑에서 보고 배운 습관도 있지만, 성인이 된 후로도 내 소비관에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     


내가 방송작가로 일할 때였다. 한 교양프로그램 팀에 나는 막내 겸 서브 작가로 들어갔고 나보다 열 살 위 메인작가와 함께 일하게 됐다. 그분은 내가 그동안 만났던 메인작가와 풍기는 분위기나 행동이 달랐다. 권위 의식이 전혀 없다고 할까. 화통하게 잘 웃었으며 옷차림은 늘 소박하고 털털했다. 막내인 나는 매주 커다란 전지에 출연자가 볼 프롬프트 원고를 써야 했는데 자신도 돕겠다며 직접 매직 팬을 들고 나섰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쩔쩔맸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전지 두 장을 펼치고 수다를 나누며 함께 프롬프터를 작성했다.      


그동안 내가 본 메인작가들은 아무리 교양프로그램 작가라 해도(예능 작가들은 확실히 화려하다) 명품 백 하나씩은 들고 다녔다. 본사에 들어가거나 명사를 섭외하는 등 이미지 관리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당시 명품 가방을 들 능력도, 멋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나는 그런 선배들을 보며 그저 멋지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메인작가가 되면 당연히 명품 백을 들고 다니겠지, 흐뭇한 상상을 하며.     


그 선배는 달랐다. 서너 벌의 옷을 돌려 입는 듯했고 헐렁한 싸구려 재질의 합성섬유 가방을 매일같이 들고 다녔다. 시커멓게 때가 탄 아이보리색 가방에는 아이가 볼펜으로 낙서한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방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함께 일한 지 몇 개월이 지나고 속마음을 편히 터놓는 사이가 되면서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 가방만 메시던데. 아끼는 가방인가 봐요.”

“아, 나 가방 이거밖에 없어서. 나는 물건을 잘 안 사.”     


아차, 싶었다. 메인작가라고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집안마다 사정이 있고 아이를 키우려면 맞벌이해도 살림이 빠듯하다고 들었다. 아이 물건은 거침없이 사도 내 물건 살 때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의 철없는 질문에 혹시나 무안하진 않았을까, 자책감이 들려는 순간 선배는 의외의 말을 이었다.     


“나는 집에 물건이 쌓이는 게 싫더라고. 내가 죽으면 내가 쓰던 물건들은 백 년이 지나도 썩지도 않고 계속 남아있을 거 아냐. 가방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지구에 내가 산 흔적을 많이 남기고 싶지 않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관점이었다. 옷과 가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후까지 고려해서 물건을 산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쓰던 수많은 물건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옷장을 가득 채운 입지 않는 옷, 신발장 안의 운동화와 구두, 싱크대를 가득 채운 그릇들과 책상 위를 장식한 자질구레한 소품들까지 갑자기 짐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누가 치울까, 나는 자식도 없는데. 가만, 치운다고 치워지나. 일부는 불태워지면서 대기오염이나 시키겠지. 땅에 묻은 물건은 화학물질이 침출 되어 토양을 오염시킬 테고. 환경이 오염되면 그 피해는 결국 인간에게 돌아갈 터인데, 누군가에게 아토피나 난임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 그때쯤이면 의학 기술로 모두 극복이 되려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소비와 환경의 관계처럼 순환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남기지는 못할망정 해를 끼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선배의 말과 실천에 나는 물건 소유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하게 되었다. 여전히 예쁜 물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트렌디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지만 그것을 내가 꼭 소유해야겠단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하는 기쁨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래 가는 것은 품위 있는 행동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다고 무시하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으려는 솔선수범.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매직으로 전지에 프롬프트를 써 내려갔던 선배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실천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현대판 ‘소로’처럼 보이던 선배. 새 물건을 사려고 할 때면 그 선배가 종종 떠오른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여전히 ‘쿨하게’ 살고 계시려나. 지금도 그 가방을 메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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