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친구가 없...
모두가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너무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 본인만 힘들다’ 하는 말이 요즘은 더 통용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착해야 한다는 강박이 낳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상대방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착하다, 나쁘다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만약 그 기준이 ‘거절’이라면 나는 나쁜 사람이 분명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단호하게 거절을 잘했다. 물론 마음이 편하지 않다. 보통은 상대도 고민하고 꺼낸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내가 주로 거절하는 부탁은 나의 노동, 즉 시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이다.
‘글’은 엄연한 육체와 정신노동의 산물이지만 작가의 노동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만 인정받는 것 같다. 그것이 한순간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닌데 말이다. 가끔 나에게 자신이 쓴 글을 한 번 봐달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첨삭해 달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목차 구성을 봐 달라, 심지어 책 한 권 분량을 ‘한 번 봐달라’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신기한 점은 나와 1년 넘게 글 모임을 하거나 친분을 쌓아온 글벗들은 그런 부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두 번 온라인이나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 혹은 과거에 알던 사이인 사람에게서 불쑥 연락이 온다. ‘덕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에 도전해보려고 한다’하는 반응은 무척 반가웠고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그런 말을 나누고 나면 어김없이 불편한 부탁이 숨어있었다.
그러면 나는 나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고마운 그들에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바쁘다고 둘러댈 때도 있지만 ‘저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일에는 저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고 노동인 만큼 비용을 받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냉정하게 하지만 속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도 괜히 야박한 사람이 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해주려나, 내가 너무 까칠한가.’ 하는 반성도 해본다.
하지만 그 찝찝함은 결국 잦아든다. 내 소중한 시간(시간은 곧 체력)을 지켰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그 일을 하느라 빼앗긴 시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미루어야 한다. 상대방의 부탁이라서, 나에게 실망할까 봐,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심하면 아토피가 심해지고 소화장애를 일으킨다.
다른 글쓰기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그런 ‘서비스’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하는 간절함을 외면하는 것이 맞을까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나는 ‘글쓰기 코치’로 활동하며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올바른 쓰기 법을 안내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 일은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일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한 두 번 부탁을 들어주면 곤란한 상황은 쌓이게 된다.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줄 수 없다. 또 대가 없이 해주는 일들은 대개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그만큼의 전문성이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렇게 하면 동종업계에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봐주는 일은 간단한 일이야’라는 잘못된 의식이 자리 잡을 테니.
글 한 편을 살펴보고 첨삭을 해주는 일에는 적지 않은 수고가 들어간다. 만약 5천 자 글에서 고쳐준 부분이 단어 두 개였다고, ‘꼴랑 단어 두 개 고쳤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단어 두 개를 고치기 위해 5천 자를 읽어나가면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맥락을 확인하고 더 나은 문장이나 단어를 고민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나조차 오랜 시간 간과했던 부분이다. 한 번은 단행본 한 권 분량을 윤문, 교정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작가가 아닌 편집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며칠 안 걸리겠지 생각했다가 큰 코(아니, 작은 코)를 다치고 말았다. 내가 편집자의 역할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책 4권을 내는 동안 편집자는 내 글을 고친 부분이 별로 없었다(나는 한글 파일을 양쪽으로 열어놓고 무엇을 고쳤는지 단어 하나까지 다 살펴본다). 그래서 편집자가 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고 고된 것인지 몰랐다. 직접 해보니 고친 것이 없다고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었다. 수백 페이지 분량을 읽어가며 잘못된 부분을 잡아내는 일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지치고 괴로운 일이었다(한편, 출간되기 전에 원고를 읽는 재미는 짜릿했다. 여러모로 소중한 경험)
글쓰기 부탁 외에도 나의 일정에 무리가 되거나 내키지 않는 일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고 거절하는 편이다. 그것이 나를, 내 몸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닐 때는 쉽지 않다. 상사가 시키는 일을 무조건 쳐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때에도 충분히 설명했다. 내가 맡은 업무를 끝낼 수 있는 기간을 촘촘하게 시간표를 세우고 도저히 안 될 거 같을 때에는 거절하기도 했다. 괜히 무리해서 하겠다고 했다가 마감을 놓치면 서로에게 난처한 일이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나를 미워하거나 안 좋게 생각한다면, 그 관계를 굳이 끌고 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예전에는 친구가 많은 사람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늘 웃음이 넘치고 사랑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부족한 에너지를 빼앗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함께하면 긍정의 기운이 솟는 사람들, 부탁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나는 관계도 있다. 관계의 넓이가 아닌 깊이를 보게 됐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떳떳해야 할 내가 있다. 나 역시 상대에게 불편한 부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건 남들도 싫어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