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어폰 없이 산책을 갔어. 눈으로만 보아도 아름다운 봄인데 소리로도 느껴볼까 해서. 귀를 열고 간 덕에 놓칠 뻔한 장면을 발견했어. 음악 소리가 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학교 담벼락 밑으로 고등학생들이 응원 연습을 하고 있는 거야. 양손에는 반짝이술을 들고 남학생 여학생들이 함께.
자연스레 우리 대학시절 응원단이 떠올랐지. 나는 단장, 너는 부단장이었잖아. 기억나? 그때 청아 MT에서 선배들이 니들이 알아서 정하라고 했던 거. 우리 기수가 4명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난 할 거면 단장하고 싶다고 뻔뻔하게 나섰고 착한 네가 그럼 부단장 하겠다 했고. 생각해 보면 너도 단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내 욕망에만 주목했던 거 같아 미안해.
우리가 합을 맞춘 응원곡 중에 서문탁 노래가 많았잖아. 특히 02학번 선배들이 축제 때 뛰는 걸 처음으로 봤던 터라 난 유독 시원한 발성의 그 '처음'이란 곡이 기억에 남더라고. 그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아이들이 서문탁 노래로 연습을 하는 거야. 정말 놀라웠어. 그 옆팀은 HOT의 캔디로 연습을 하고 있었고. HOT는 알았을까, 20년도 지난 지금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노래로 응원 연습을 할 줄. 알면 되게 기뻐할 거 같은데.
한참을 서서 구경했어. 우리가 했던 동작들과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일렬로 서서 파도를 만들고 흩어지는 장면들 같은 거 말야. 그걸 우두커니 서서 엄마 미소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지는 거 있지. 작년만 해도 이런 장면을 보면 너와 카톡을 나누며 공유하고 공감했을 텐데 이제 그러지 못하니까. 20대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더라. 그래, 사무치게.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기 때문에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나도 저 애들처럼 몸을 움직이며 놀던 때가 있었는데, 주말에도 학교에 가서 연습하고 그랬는데. 하루종일 음악을 틀어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과방 복도에서, 주차장에서 연습하고 그랬잖아. 우리 그때는 야외에서 연습하려면 '돌돌이'라고 긴 전선을 빌려와서 CD플레이어를 틀어야 했잖아. 돌돌이를 빌리지 못하면 음악을 틀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서 그 옆에 마이크를 놓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 있었던 거야. 참 웃기지.
나 이런 재밌는 생각 하며 너와 수다 떨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고 속상해. 너도 그럴 거 같아. 우리 더 자주 만날 걸 그랬어.
S야, 너가 그랬잖아. 항상 사람들한테 싫은 내색 안 하고 속으로만 담아두어서, 그래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나는 네가 그저 착한 줄만 알았어. 장례식장에서 만난 선배도 그러더라. S는 착하고 너무나 무던한 아이였다고. 너가 그렇게 속으로 곪아가는 동안 우린 그저 널 좋은 애로만 기억한 거야. 너는 그렇게 20년 가까이 더 살았는데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속상한 일이 많았을까.
지금 있는 곳에서는 편안하게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까칠하단 소리 듣고 살았음 좋겠어. 나의 대학시절 한편을 아름답게 채워준 내 친구, 청아 부단장 S야.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