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우리 동네 상가에 처음으로 대형 피트니스센터가 들어왔다. 지금은 한 블록 건너 있을 만큼 운동센터가 많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조성한 신도시라 다닐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반가워서 얼른 상담하러 갔다. 지금 등록하면 오픈 특가로 할인해 주고 요가, 줌바 등 GX 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다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당연히 지금까지도 ‘오픈’ 특가다). 처음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체력에 기초가 되는 근력을 키우려고 했는데 엉뚱하게 줌바에 꽂히고 말았다.
GX룸이라고 적힌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사방에는 전신거울이 붙어있었다. 딱 봐도 운동 좀 하는 여성들이 몸을 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숏컷에 날렵한 몸매, 잔근육이 탄탄하게 드러난 팔 라인에는 문신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이삼십대로도 보겠지만 말투에서 드러났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은 연령대 같았다. 원래 아는 사이일까, 아니면 운동을 하다가 가까워진 건가. 괜히 혼자 뻘쭘해진 나는 약간 뒷자리에 서서 강사님이 오시길 기다렸다.
회원들도 이렇게 멋있는데, 강사님은 얼마나 카리스마 넘칠까. 유튜브에서 보았던 줌바 댄스 강사가 떠올랐다. 라틴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드는 늘씬한 선생님. ‘이국적인 외모에 11자 복근이 있겠지. 분명히 글래머일 거야.’ 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부풀리고 있는데, 허리에 셔츠를 두른 키 작은 중년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음악을 틀 때만 해도 강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튼튼한 외형이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데 ‘저렇게 몸이 무거워서 격렬한 춤을 잘 추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걸까,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몸 풀고 바로 시작할게요!”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한순간 GX룸이 어두워지더니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졌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번쩍번쩍한 싸이키 조명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곳은 클럽, 아니 노래방,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는 이런 곳에서 한때 신나게 놀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밝히지 않겠다. 왠지 모르게 진지한 이 상황이 웃겼다. 모여서 춤을 춘다는게 귀엽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색한 것도 잠시, 어느새 리듬에 몸을 맡긴 나는 흥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년의 선생님이 훨훨 날아다니는데 내가 얌전히 있어서 되겠는가! 그녀는 작은 거인이었다. 구령은 우렁찼고 동작에서 힘이 넘쳤다. 열두 명이 한 몸이 되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팔을 휘두르고 점프를 해댔다. 여러 사람이 음악에 맞춰 똑같이 춤을 추니까 왕년에 응원 단장을 하던 멋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한 곡이 끝나자 탈진 지경이 됐다. 뒤에 이어질 곡을 생각 안 하고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탓이다.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 와중에 기분은 또 왜 이렇게 좋은지. 다음 곡이 데스파시토인데 참을 수가 있나.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벌컥벌컥 마신 사람처럼 다시 기운이 샘솟았다. 지금 이 순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 온 것만 같았다. ‘나 줌바 좋아하네.’
첫 수업에서부터 줌바 댄스에 재미가 들린 나는 그 시간만 기다렸다.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흥겹게 흔들고 나면 십 년 묵은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불타오르는 줌바 열정은 의외의 상황을 맞이하며 꺼져버리고 말았다.
음악과 동작에 익숙해져서 자신감이 생긴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다르게 앞자리에 섰다. 강사님의 에너지를 가까이에서 받으면 더욱 신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팔에 문신을 한 여자였다. “거기 제 자리인데요. 알면서 그러시면 안 되죠.” 나는 깜짝 놀라서 “아, 네네.”하고 얼른 뒷자리로 물러섰다. 얼떨결에 물러서긴 했는데 잠시 후 어리둥절했다. 춤추는 자리에 이름표라도 붙여놨는가. 네 자리, 내 자리가 따로 어딨단 말인가. 한마디 할까 고민하는 찰나, 강사님이 들어와서 참았다(무서워서 말 못 한 거 맞다).
그날 이후 줌바 수업에 들어가면 문신을 한 여자와 그 친구들이 날 보며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고, 학창 시절 일진을 마주친 것처럼 그들이 두렵게 느껴졌다. 성인이 돼서 이런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마음이 상해서 줌바를 춰도 전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혼자 유튜브를 틀어놓고 보충 연습을 하고 싶었다. 문제는 강사님이 틀어주는 노래 제목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무슨 노래인지만 알면 검색해서 틀어놓고 외운 동작으로 혼자서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강사님께 물었다. “혹시 오늘 수업할 때 튼 음악들 제목 좀 알 수 있을까요? 줌바가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가서도 연습하려고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내게 강사님은 의외의 답변을 했다. “아, 그건 안 돼요. 저작권 때문에 함부로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혹시 뜻을 오해한 걸까, 나는 다시 풀어서 설명했다. “아, 음원을 달라는 게 아니고요. 제목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그것도 안 돼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누구나 즐겨 듣는 라틴 음악인데, 그 음악이 강사의 노래도 아닌데 저작권 때문에 제목을 알려줄 수 없다니. 줌바 댄스 음악 소속사가 국정원이었던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황당하기만 했다. 나는 그 핑계로 줌바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줌바와 3개월, 짧은 사랑을 했다. 길을 걷다가 리드미컬한 줌바 댄스 음악이 들려오면 현란한 조명이 돌아가는 그 GX룸이 떠오른다. 아, 진짜 재밌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