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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Feb 17. 2023

발리행 비행기 안에서 끄적끄적

생각 가둬놓기


- 비행기 안은 내가 아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 중에 최고로 꼽힌다. 다른 장소로는 장례식장이 있다. 비행기 안은 인터넷이 되지 않으며 시차가 바뀌기도 하니 시계도 믿을 수 없다. 약간의 자유로움과 극도의 지루함이 공존하는 곳. 남아도는 시간에 글을 써보기로 한다.


-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상공 1만 2천 미터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못 믿겠다. 특히 밤이 되면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보이던 하늘마저 까매지면서 형광등이 켜진 실내가 거울처럼 비친다. 안경 쓴 못생긴 애가 날 쳐다본다.


- 플라스틱(으로 보이는) 연약한 창문 프레임이 밖과 안을 분리하고 나를 숨 쉬게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렵다. 그것을 믿기 시작하면 아찔해서 숨이 가빠질 테다. 나는 비행기라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 기분이다. 무대는 흔들리는 기내 세트장이다. 내내 들리는 요란한 기압 조절 장치 소리에 귀는 적응되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MRI기계 통 속에 들어온 것 같다. 탑승객 모두 함께 검진을 하는 것이다. 척추일까 뇌일까 기왕이면 각자 평소 아팠던 부분을 모두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흔들리면 난 심장이 오그라들면서 금방 죽음을 떠올린다. 우선 누구보다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내 가족, 엄마 아빠와 내 남편의 부모 얼굴이 그려진다.  우리 부부의 영정사진과 놀란 사람들 얼굴도 보인다. 이륙 직전에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공항 사진이 공식적인 마지막 기록이 되겠지. 스토리 24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허망하다. 친구들은 내가 올린 인스타 최신 사진에(남편과 비행기에서 찍은 셀피) 보고 싶다는 댓글을 달 것이고. 요가샘은 선영님이 왜 요즘 안 나오지 생각하다가 나에게 연락을 할까, 그냥 궁금해하다 말까. 내 원고는 어찌 되는 걸까. 네이버에 백업해 뒀는데 그걸 누가 열어보겠나. 써놓은 초고로도 출간이 될 수 있을까. 안 되겠지, 그럼 계약금 선인세만 돌려주면 되는 건가. 가족이 물어주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 앞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유서를 써야 하나. 난기류가 오랜 시간 계속된다. 불안이 점점 부풀었고 옆을 보니 남편은 태연하게 책을 읽는다. 잠시 잠잠해지자 남편이 승무원에게 우유와 쿠키를 주문했다. 귀엽다, 쿠키와 우유라니.


- 비행기가 또다시 흔들려 나는 공포에 질려 내 머릿속 망상을 남편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당신은 그런 생각한 적 없어?"라고 물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는단다. 자신은 '우유가 쏟아지면 어쩌지' 생각이 들어서 얼른 마셨단다. "비행기 사고 잘 안 나잖아,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냐?" 하는 핀잔에 나는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아 우리 코앞에 있어. 죽음에 예고는 없지". 근엄한 목소리로 이어령 선생님 같은 말을 하며 스스로를 멋지다고 여긴다.


-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낙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싶다가도 어차피 통제 불가능한 죽음, 걱정하는 게 맞을까. 낙관하는 게 맞을까. 맞다는 것이 무엇일까.


- 승무원은 참 대단한 직업이다. 공포를 직업으로 갖다니.


-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공항 서점에서 샀다. 어떠한 내용인지 모르며 단편집 인지도 몰랐고 그냥 김연수라 샀다. 작가의 이름만 보고 사는 책을 쓰는 작가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내 이름만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사는 독자가 있다는 황홀한 상상을 해본다.


- 단편 <진주의 결말>에 진주가 치매 걸린 아빠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라고 묻는 장면을 읽었다. 네 엄마와 결혼하고 신혼여행했을 때라는 답변이다. 나도 쿠키를 먹는 남편에게 물어봤다. 남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만났을 때"라고 했다. 나는 "우리는 스페인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지, 첫눈에 반한 사이는 아니다. 한국 돌아와서 사귀었는데, 그때는 날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행복했다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하는 남편. 논리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나는 곧 이해하게 됐다. 어차피 행복했던 순간은 과거이다.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하는 계기가 된 그날을 행복한 순간이라 결정하는 그가 그저 고마웠다. 예전의 나였다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며 끝까지 추궁했을 텐데. 달라진 나 자신이 좀 기특하기도 하고. 나는 나를 참 사랑하는구나.


- 요즘의 나는 죽음을 자주 떠올린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손에 잡혀 읽는 책들은 족족 죽음과 혼돈을 이야기한다. 친한 친구가 2주 전에 죽었다. 내가 죽음을 자주 떠올려서 그런 책이 손에 들어오는지 그런 책들을 읽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 두서없는 이 글은 스마트폰 메모장에 작성하고 있는데 발리에 도착하면 브런치에 바로 올릴 예정이다. 물론, 살아있다면 말이다.

-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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