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시작하는 상담 공부
사십 대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어린 나이였다. 이십 대 때는 으레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 부인의 모습을 연상했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은 중년이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억울해 보였다(이래서 영포티란 말이 생겼구나!). 그렇지만 생활은 안정되었고 그만큼 심리적인 어려움도 줄었다. 평생 함께하고픈 짝이 옆에 있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물욕도 없는 편이라 딱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이었다. 가끔 이 편함이 권태롭게 느껴질 때면 뮤지컬로 감정으로 고양시켰고, 일렉 기타를 배우면서 깊은 몰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쓰면서 내 안의 것을 너무 퍼내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부였다. 20년 만에 학생이 되고 싶어진 것이다. 그 생각의 출발점은 고전이었다. 고전을 읽으면서 철학에 호기심이 생겼고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상담대학원에 입학했다. 철학상담을 세부 전공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실제 생활과 연결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논리를 앞세우는 나의 태도를 내려놓고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경청하는 자세도 익히고 싶었다.
그렇게 9월부터 나는 팔자에도 없던 학교를 다니고 있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새벽 6시에 기상을 해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면, 아침잠이 많은 나는 고 3 때도 그 시간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일어나서 야무지게 빵에 버터를 발라 먹고 커피까지 손수 내려 텀블러에 담아 백팩을 짊어 메고 버스에 올랐다.
한동안 학생이 아닌 강사로 살았다.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갈 때는 숄더백 속에 강의자료가 담긴 유에스비, 학생들에게 나눠줄 선물용 도서, 파우치 따위가 들어 있었다. 학생이 되니 달라졌다. 전화번호부(이거 아는 사람은 내 친구다)만 한 전공 책에 노트북까지 넣으려고 하니 척추가 틀어지지 않으려면 등짐을 지어야 했다. 그 핑계로 배낭을 하나 장만했다.
강사인 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모노톤의 단정한 차림을 고수했다. 계절 마이에 슬랙스 바지, 구두를 챙겨 신었다. 은은하게 화장을 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녔다. 학생인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다. 선크림만 간신히 바르고 등짐을 짊어맨 후 구부정한 자세로 버스를 기다린다. 좌석에 앉아 이어폰으로 토익 리스닝을 들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 눈을 뜨면 내려야 할 정류장이었다. 토익이라니. 학부 때만 해도 토익 필수가 아니라 운 좋게 넘어갔는데, 절망스럽게도 대학원 졸업 요건에 토익 점수가 포함돼 있었다. 그 핑계로 영어 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한 순간에 상황이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뮤지컬은 언감생심, 밀려드는 과제 폭탄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목 아프게 떠 들어대는 강의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3시간씩 앉아서 졸음을 몰아내며 교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게 더 힘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다행인 점은 내가 택한 학교이고 수업이다 보니 내용이 재밌다. 책 속에서 인용된 내용으로 가볍게 접했던 심리학 이론들을 하나하나 파고들고 그 흐름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수업 덕분에 고전 영화와 책을 강제로 보게 되는 점도 좋았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인생 영화를 발견하게 됐고, <장자>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 들고 있다.
바쁘고 부담스러운 일상이 펼쳐지지만 희한하게도 즐겁다. 늘어진 고무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듯 기분 좋은 긴장감이랄까.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하면 당분간은 책 집필도 멈춰야 할지 모른다. '왜 평안한 삶을 깨뜨리고 사서 고생을 하지?'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도 있지만, 오랜만에 학생이 된 소감은 삶을 새로고침한 것처럼 가뿐하고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