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유쾌한 죽음론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그러니까 스무 살 언저리까지 종교가 있었다. 어린 나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엄마 손을 잡고 교회로 향했다. 전통시장을 빠져나와 교회로 향하던 골목길은 지금도 눈에 훤하다. 교회는 나에게 재미있고도 신성한 공간이었다.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고, 기도와 찬양을 했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으며 중고등학생일 때는 방학이면 수련회에 꼬박 참여했다.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예배 시간이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통성 기도를 했다. 목사님이 경건한 얼굴로 "주여, 삼창을 하겠습니다. 주여!"를 외치면, 신도들과 함께 "주여! 주여! 주여!"를 삼창 한 후, 목이 쉬도록 소리를 쳐가며 기도를 했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고, 나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따라 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방언'이라고 했다. 주님께 은혜를 받았다며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게 뭔지 모르지만 가슴이 뜨거웠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내가 믿는 신과 다이렉트로 통하는 언어라고 했다. 참고로 사이비 종교는 아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순복음교회는 장로교에 비해 열성적인 편이었다. 중학교 때는 친구도 두 명 전도했다. 그 친구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를 다닌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를 전도해 놓고 혼자 튀었다.
대학교에 들어가 동아리에서 사회과학을 배웠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학회장 선배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중의 역사를 배웠다. 세상은 전혀 평등하지 않았고,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은 착취라는 관계로 엮여있는데 나는 누가 봐도 노동자 계급의 딸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 빤히 보였다. 자본주의사회 체제를 유지하기에 종교란 훌륭한 도구였다. 노동은 신선한 행위기 때문에 '근면함'은 미덕이 되었다. 분쟁하지 않는 선량한 태도, 신을 따르고 순종하는 종의 삶.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주일에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가부장적인 설교 말씀. 그 모든 것이 이십 대의 나에게 반감으로 다가왔고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아무튼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무신론자로 살고 있다.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유물론의 시각을 기본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홀가분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이다. 동물인데 조금은 기특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주어진 생을 잘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유기체. 사후 세계를 삭제하자 인생이 간단해진 기분이 들었다. 다만, 때때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잃게 된다면 얼마나 큰 상실감을 겪게 될까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다 올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윤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요즘은 장자의 철학을 배우고 있다. 헤세가 왜 동양철학에 몰두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자의 철학은 내가 추구하는 자유, 변화, 소통, 무리하지 않는 양생을 말한다. 유물론자의 삭막한 가슴에 단비를 뿌려주는 듯했다.
특히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재미있고도 위로가 되었다. 장자는 죽음을 비극적인 사건이나 삶의 단절로 보지 않고 물화(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동양철학의 '기'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장자에 따르면, 만물은 기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과정에 형태가 만들어지고 그 모습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소멸이란 없다.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또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전환된다. 가장 유명한 장자와 나비 '호접몽' 우화에서도 그러한 관점이 보인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에서 깨어난 장주는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주 꿈을 꾼 것인지 헷갈려한다. 이는 꿈과 현실,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우리의 자아도 하나의 고정되어 있지 아니다. 특별히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조물자의 작용에 따라 흩어진 기는 다시 모여 무언가가 될 터이다. 장자는 사람이 죽어서 매미의 날개나 벌레의 다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의 윤회처럼 또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우습다! 내가 개미 다리가 되다니. 이왕이면 롱다리였으면 좋겠는데.
<장자>의 '대종사'편에는 자사, 자여, 자래, 자리 4명의 막역지우 이야기가 나온다. 그 친구들은 죽음을 앞두고 병이 들어 몸이 뒤틀려도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팔이 닭이 되면 울부짖으면 되고, 엉덩이가 수레바퀴가 되면 굴러가면 된다고 말한다. 장자는 이렇듯 죽음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이고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안명'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덕'이라고 했다. 어려운 일인 만큼 욕심난다. 나는 과연 '안명'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장자의 말대로 죽음은 불가지, 운명의 영역이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사후 세계의 존재, 종교도 결국 선택의 문제다. 얼마 전 다시 관람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된 후 홀로 표류하던 파이가 200일(?)만에 극적으로 발견됐다. 파이는 난파선 보험 조사원에게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다 위에서 호랑이와 대치하다가 그를 길들여 공존한 이야기, 그리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과 싸우고 식인을 해 살아남은 이야기. 둘 중에 더 현실적인 이야기는 후자이지만 어떤 이야기를 믿을지는 자신의 선택이라고.
무신론자는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다. 종교는 무겁지만, 자연의 순환 과정의 일부로 동참하는 것은 자유롭고 가벼우며 위안이 된다. 선택을 움직여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