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도 막내작가
개미지옥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내일이요? 네네! 당연히 가야죠, 그 시간 좋아요."
시작도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다. 프리뷰 경험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에게도 나름 ‘경력’이라는 게 생겼단 말이다. 이력서에 프리뷰 경험을 넣은 게 도움이 된 걸까? 다섯 번째로 이력서를 넣은 외주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날짜와 시간은 무조건 맞추면 된다. 하지만 반가움이 가라앉자마자 걱정이 들이닥쳤다. '면접 때 뭐 입고 가지.' 제대로 된 면접은 처음인 데다 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좀 프리 하게 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더욱 고민이 됐다. ‘그래도 면접인데 정장을 입어야 하나.’ 청바지와 정장 중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평소 모습대로 가기로 했다. 캐주얼 차림에 옅은 화장을 했다.
알아주는 길치인지라 한 시간 여유를 두고 출발하길 잘했다. 버스를 잘못 내리는 바람에 홀로 여의도 여행을 하다가 면접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다. 프리뷰를 했던 회사처럼 가정집은 아니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프로덕션인지 사무실에 칸막이도 있었고 넓었다. 기척을 했지만 아무도 낯선 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들 컴퓨터 앞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난감했다.
“저.. 막내작가 면접 보러 왔는데요”
나는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내 또래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느 프로그램이세요?”
여자가 무표정하게 나를 사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인상 좋아 보이는 한 남자는 하품을 하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면접 사실을 아무래도 잊고 있는 듯했다.
"아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디 보자아~ 공간이~ 마땅히 공간이 없네"
‘편집실’이라는 푯말이 문에 붙은 1평 남짓 방에서 면접이 진행됐다. 좁은 내부에는 30년은 묵은 듯한 담배냄새가 깊게 배어있었다. 인상 좋은 40대 남자는 PD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메인작가가 지금 자리에 없어가지고~ 내가 팀장인데, 명함이 아직 PD로 돼있네, 얘네는 왜 명함을 안 바꿔줘~"
인상과는 다르게 짜증이 많은 성격인 듯하다. 회사생활을 안 해본 나는 직급을 잘 모른다. ‘팀장이 높은 건가? PD가 더 좋은 거 아닌가?’ 나는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인작가는 결국 오지 않았고 PD인지 팀장인지 모를 그에게 면접을 봤다.
면접 질문은 생각보다 쉽고 간단했다.
- 이 프로그램에 왜 지원했죠?
- 프로그램 모니터 했어요?
- 보니까 어떻던가요?
- 평소 성격이 어때요?
- 술은 잘 마셔요?
술 잘 마시는 건 왜 물어보는 걸까. 못 마시면 떨어질 수도 있는 건가. 나는 술에 약한 편이지만 분위기를 맞출 정도는 마신다며 ‘예상 정답’을 말했다.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질문들에 최대한 충실하게 답했다. 10분이나 흘렀을까.
"내일 연락 줄게요~" 하더니 쿨내 풍기며 사라지는 '조PD 팀장님'.
그렇게 일주일 같은 하루가 지나고 면접 후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술을 아주 잘 마신다고 했어야 하나?’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친 건 아닌지 애간장이 녹는 것만 같았다. 면접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대답도 충실히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떨어질 이유가 없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 팀장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저, 그저께 막내작가 면접 본 OOO인데요. 어제 연락을 주신다고 했는데 전화가 없으셔서"
"아~ 다음 주부터 출근하세요. 너무 바로 연락하면 없어 보일까 봐 그랬지. 뭐 그렇다고 전화까지 해요 참."
깜박한 게 분명하다! 누군 애타게 기다리는데. 조금 화가 났지만 기쁨이 오백 배는 더 크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면접 합격을 내 손으로 전화해 확인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좀 황당하다. 팀장님은 더 황당했겠지? 아무렴 어떠랴, 나는 이제 무려 막내 ‘작가’인데. 쫄깃한 밀당 끝에 드디어 시작한 방송작가 생활! 그것은 개미지옥의 다른 이름이었으니.